<9> 죽음의 그림자

초비는 붉고 탐스럽게 핀 작약 꽃을 화병에 담아 왕비에게 바쳤다. 왕비는 한참 동안 작약을 바라보더니 눈물을 흘렸다.

“이 작약은 수줍은 여인의 마음을 나타낸단다. 나는 원나라의 공주이 면서 고려의 왕비로 살고 있지만 어느덧 청순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사랑을 잃고 지아비를 원망하는 못된 여인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고려 에서의 이십년 세월이 한순간 춘몽 같구나. 초비야, 내 고향 술이 마시고 싶구나.”

왕비는 작약을 바라보며 또 흐느꼈다.

“왕비마마, 옥체를 보전하셔야 합니다.”

“나는 이미 깊은 병에 걸려 정상인이 되기는 틀렸구나. 몽고의 술 아라키를 가져오너라.”

아라키는 원나라에서 수입된 독한 소주(燒酒)였다.

“마마, 우선 식혜로 목 좀 축이세요. 아라키를 곧 내오겠나이다.”

초비가 식혜를 왕비에게 올렸다. 초비를 비롯한 경성궁 나인들은 점점 더 악화돼가는 왕비의 건강과 광기에 치를 떨었다. 나인들이 조금이라 도 마음에 안 들면 왕비는 회초리를 들었다. 두 눈이 움푹 들어가고 얼굴 에 까맣게 기미가 낀 왕비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루 세끼 식사는 거른 채 술로 대신하고 있었다. 친원파 들은 왕비의 그 같은 행동을 걱정 하면서도 말리지 못했다. 왕비는 원나라에 있을 때부터 자주 법석(法席) 에 즐겨 참석하였지만 고려에서의 행동은 부처의 말씀과 정반대였다. 장 순용은 왕비의 건강이 악화되자 이름 있는 스님들을 경성궁에 초빙하여 3일 밤낮으로 염불을 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승대덕들의 염불도 소용이 없었다. 왕비는 그 와중에도 술을 찾았고 초비는 그때마다 독한 아라키 와 독약이 든 식혜를 같이 올렸다. 무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왕과 도라산 으로 사냥을 떠났다.

“그놈이 무비년하고 사냥을 갔다고? 그년이 자리에 누웠다고 하더니 어찌된 것이냐?”

장순용과 인후는 왕비의 물음에 대답을 못하고 주저하였다.

“그 연희라는 종년이 무비년에게 약을 먹이고 있는 게 확실한가? 아니 면 나에게 상금만 받고 그년이 말을 안 듣고 있는 거 아닌가? 인후는 당장 그년을 잡아오너라. 어서.”

“왕비마마, 그 계집도 무비년을 따라 도라산으로 간 줄로 아옵니다.”

“사냥 좋아하네. 그놈이 사냥을 핑계 삼아 무비년하고 오입질하러간 것이지. 나쁜 놈, 세자까지 낳은 나를 이리 박대를 하다니, 내 반드시 그 연놈들을 죽이고 말리라. 반드시.”

왕비는 이를 갈면서 무비뿐만 아니라 왕에게도 서슴없이 욕을 해댔다. 옆에 있던 장순용을 비롯한 친원파 인사들은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왕과 왕비가 화합하기는 틀렸다고 결론을 내렸다. 점점 악화되어가는 왕비의 건강에 신경을 쓰고는 있었지만 그들 은 인력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것에 안타까워했다. 이러다 왕비가 죽기 라도 할 경우 그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생각해야 했다.

“아라키를 더 내오거라. 속에서 열불이 나는구나. 어서.”

왕비는 아라키에 대취하여 거의 인사불성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하여 독주를 마셔댔고 경성궁에 한바탕 광풍이 불어야 잠잠 했다.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고려 출신 나인들을 불러 옷을 홀랑 벗기고 매질을 하기도 하고 스스로 옷을 벗고 춤을 추다가 지쳐서 잠들기도 하였다.

즐거움이 극에 이르면 슬픔으로 변하게 되니 이것이 세상만사 이치라 할 수 있다. 왕과 왕비는 애초부터 여러모로 화합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 로 얼굴도 모르는 상태에서 원나라와 고려의 정략적 혼인은 두 사람의 인생을 크게 바꾸어 놓고 말았다. 원나라는 고려를 자신들의 속국으로 대하며 고려에 많은 아픔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약소국으로 전락한 고 려는 피정복국의 처지에서 원나라의 요구에 응해야 했다. 고려의 왕은 원나라 공주와 혼인을 해야 했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나는 왕자는 원 나라에서 일정기간 볼모로 있어야 했다. 세자 왕원은 반쪽 몽고인이면서 도 완전한 몽고인이기를 원했다.

어려서 대도에 들어간 그는 성인이 되 어도 본국 고려로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원나라 공주를 어머니로 두고 고려국 왕세자라는 지위와 원나라 황손(皇孫)이라는 막강한 신분으로 그는 원나라 황실에서 일정한 지위를 차지하려 애썼다.

10년 넘게 대도에 머물고 있는 세자 왕원을 위하여 고려에서는 매년 막대한 비용을 대야 했다. 못난 세자 한 사람을 위하여 고려의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려야 했다. 고려왕은 그런 세자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 다. 왕과 왕비가 원나라에서 돌아온 지 두 달이 되었다.

5월 들어 왕비의 병이 위중해지면서 그녀는 사경을 헤매는 상태가 되었다. 왕은 왕비를 개경에 있는 현성사(賢聖寺)로 급히 옮기도록 하였다. 친원파 세력들은 모두 현성사에 모여 왕비의 쾌유를 비는 법회를 열기도 하였지만 그녀의 상태는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국내파들은 왕비의 상태를 예의주시하 면서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였다. 무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의의 말로는 몽고녀가 열흘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여 러분들 이제 몽고녀가 사라진 뒤의 일을 상의하고 준비해야 할 때가 되 었습니다. 각자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말씀해 보세요.”

무비의 처소에 국내파 중신들과 지지자들이 모였다. 그들은 왕비의 혼 수상태에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장차 일어날 사태에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

“문제는 대도에 있는 세자입니다. 그는 성격이 불같아서 몽고녀가 죽으면 귀국하여 몽고녀의 죽음에 대하여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하려 들것 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들은 행동을 극도로 자제해야 합니다. 앞으로 열 흘 동안은 주루에 가는 일을 삼가고 주연을 베풀거나 그런 자리에 참석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송린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다.

“초비와 연희 그리고 무녀 천옥은 어찌할까요?”

최세연이 뒤탈을 염려하여 물었다.

“내 생각에 초비를 경성궁에 그대로 둔다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초비 와 연희를 궁궐에서 멀리 피신시켜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무녀 천옥도 개경에서 다른 지역으로 보내야 합니다. 그들 입에 우리 국내파의 생사 가 달려 있습니다.”

도성기가 심각한 얼굴로 말하였다.

“만약 초비와 연희가 동시에 사라진다면 친원파 중신들의 의심을 받 을 수 있습니다. 먼저 초비와 천옥부터 멀리 보내 놓고 좀 더 추이를 지 켜보시지요. 그리고 세자가 귀국하면 분명히 국내파들에게 칼을 겨눌 겁 니다. 그에 대한 대비도 해야 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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