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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의녀 시무비'<10>징키스칸의 혈통, 고려 세자
2019년 09월 11일 (수) 10:26:47 최재효 cjhoy6044@korea.kr

<10> 징키스칸의 혈통, 고려 세자

이번에는 나중에 국내파에 합세한 중랑장 김근(金瑾)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했다. 그는 무장이지만 치밀하고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중랑장 의견이 옳습니다. 도성기 장군께서 서둘러 천옥의 근거지를 깨끗하게 정리한 다음 천옥에게 은자를 넉넉히 건네고 지리산 자락 사찰 이나 산촌으로 내려 보내 다시는 개경으로 올라오지 말라고 하세요. 그 리고 지금 경성궁이 텅 비어 있을 것입니다.

초비를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빼돌리면 친원파 들에게 의심을 받습니다. 저들에게 의심을 받지 않을 방법을 강구해 보세요.”

무비의 지시에 따라 무녀 천옥은 즉시 집을 정리하고 개경에서 자취 를 감추었다. 그러나 초비를 처리할 뾰족한 수가 없었다. 도성기와 최세 연은 여러 날 고민한 끝에 초비를 사망한 것으로 꾸미기로 하였다. 도성 기는 초비를 태인 지방에 살고 있는 지인에게 보내고 당분간 보살피라고 하였다.

도성기는 국내파 사람들을 동원하여 개경 인근에서 죽은 지 사나흘 된 여인을 수소문 해보라고 지시하였다. 마침 해주에서 이틀 전에 실연당하여 극약을 먹고 자살한 처녀를 찾아냈다는 연락이 왔다.

“나라를 구하는 일에 협조하여 주시오.”

도성기는 처녀의 부모에게 돈을 건네고 처녀의 시신을 개경으로 비밀 리에 운반하여 왔다. 처녀의 키와 얼굴이 초비와 흡사하였다. 처녀의 시 신은 독약을 복용한 탓에 몸이 시커멓게 변해 있어서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웠다.

초비의 부모는 처녀의 시신에 초비의 옷을 입히고 초비와 비 슷하게 꾸민 다음 딸이 극약을 먹고 자살하였다고 관아에 보고하였다. 왕비의 처소에서 일하는 궁녀가 죽었다는 소식에 내시부(內侍府)와 경 성궁 나인이 초비의 집을 찾아 왔다.

“이 관 속에 초비라는 나인이 들어 있습니까?”

“네, 맞습니다. 그 애는 평생 시집도 안 가고 오로지 왕비마마를 받들 며 살겠다고 했는데 최근에는 왕비마마께서 병환이 위중하다며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딸이 왕비마마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고 자책하더니 음독을 한 듯 합니다. 시집도 못간 처녀이니 해가 지기 전에 바로 땅에 묻으려 합니다.”

초비의 부모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관 뚜껑을 열었다. 관헌과 나인은 검게 변한 시신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흘낏 바라만 볼 뿐이었다.

“장례 잘 치르시오. 돌아가서 그리 보고 하겠습니다.”

인사불성 상태의 왕비는 현성사 대웅전에 누워 있었고 개경에서 이름 난 고승대덕들이 석가모니상 앞에서 밤낮으로 쉬지 않고 독경하였다. 밖 에 마련된 천막에는 겁령구 들과 친원파 들이 왕비의 회복을 위하여 두 손을 모으고 부처님을 향해 빌고 있었다.

왕비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 동 안에 왕도 현성사에 행차하여 대웅전에 들었다. 지아비를 알아보지도 못 하고 누워서 간신히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홀도로게리미실을 왕은 물끄 러미 바라보았다. 대덕들의 관세음보살보문품독경이 목탁소리와 함께 경내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당신은 나하고 원래 인연이 닿지 않았소. 이제 이승에서의 그대 시간 이 얼마 남지 않았구려. 나나 그대나 마음에도 없는 혼인을 하여 이십삼 년의 지난한 세월을 살아왔소. 이승에서 잘못된 우리의 만남을 이쯤에서 정리하고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시오.

그대가 고려에 남긴 것은 고려 백 성들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원한과 눈물뿐이었소. 세상에 많고 많은 남자 중에 나를 만난 당신은 참으로 불행하였소. 그 불행의 씨앗이 원나라 대도에 또 하나 자라고 있으니 그대의 업장(業障)은 어쩌면 대대로 고려 땅에서 악연의 뿌리를 내리겠구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복을 받기를 원하오. 그러나 우리 둘은 복을 받기보다는 복을 차내며 서로를 경멸하 고 살았소. 우리는 악연(惡緣)이었소.

그 악연의 흔적은 당분간 고려 땅 에서 사라지지 않겠지요. 초원에서 말 달리고 약탈을 일삼았던 징 기스칸의 후예 홀도로게리미실. 나는 다시는 그대를 떠올리고 싶지 않 소. 잘 가시오. 혹여 저승에서라도 다시 만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 오.

왕비는 현성사로 옮기고 아흐레 지나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나이 39세 였고 왕은 62살이었으며, 대도에 있는 세자 왕원의 나이 23세였다. 고려 조정은 즉시 원나라에 사신을 보내 왕비의 부음을 알렸다. 원나라 황실에서도 왕비의 죽음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어머님은 무비년과 반주년 그리고 검은 세력들이 돌아가시게 했어.”

모친의 부음을 접한 왕원은 대도의 고급 기루 신궁(神宮)을 찾았다. 신궁은 고려에서 대도로 사신이나 기타 공무로 오는 고려인들이 꼭 들리는 이름난 기루였다. 대낮부터 찾아온 고려국 세자를 신궁에서는 최상급 손님으로 맞이하였다. 자주는 아니지만 왕원은 신궁을 찾으면 혼절할 정 도로 술을 퍼마시곤 했다. 신궁에 고려 출신 기녀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란아, 독주를 다오. 오늘은 취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구나.” “세자마마, 딸랑이들은 어디 두시고 혼자 오셨습니까?”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고려 출신 기녀 초란은 10여년 가까이 신궁에 서 일하며 많은 고려인들과 원나라 벼슬아치들을 단골 고객으로 두고 있 었다. 왕원은 신궁에 올 때마다 초란을 찾았다. 왕원이 만취하여 황궁에 돌아가지 못할 때는 초란은 그를 밤새 모시는 애첩이기도 했기에 그녀는 세자빈에게 견제를 받는 처지였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대도를 다녀가신지 두 달 밖에 안 되셨는데 돌아가시다니요?”

“그 멍청한 고려왕 때문에 어마마마께서 돌아가신 것이야. 내일 당장 개경으로 출발할 것이다. 주지육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려의 혼군 (昏君)을 내쫓고 고려를 접수할 것이야. 그리고 어마마마를 돌아가시게 한 연놈들을 모두 색출하여 목을 베어 버릴 것이야.”

왕원은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세자마마, 무조건 죽일 일이 아니라 철저히 조사를 해보신 뒤에 왕비 마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죄가 밝혀지면 죽여야 합니다. 세자마마께서는 부왕의 뒤를 이어 고려국 지존에 오르셔야 할 존귀한 분이십니다. 무턱 대고 왕비마마께서 돌아가셨다고 분풀이 대상으로 부왕의 총비들과 그 녀들의 추종자들 몇 명을 죽여 봐야 세자마마에게는 오히려 누가 될 뿐 입니다.”

왕원이 원나라 공주 부다시린과 혼인을 하였지만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녀는 왕원과 대화 중에도 은근히 지아비를 하대하거나 공식석상에서 깔보는 행동을 하여 자주 언쟁을 벌이곤 하였다. 부부 싸움을 할 때 마다 왕원은 일방적으로 당하는 입장이었다.

“초란이 네 말이 맞다. 이래서 내가 너를 찾아오는 게야. 이 대도에서 는 나에게 그 같은 충고를 해주는 자가 너 말고는 아무도 없구나. 나는 이번에 개경에 가면 어머니에게 반대했던 고려의 모든 대소신료들을 찾 아내 죽이려 했다. 그들의 수가 대략 천여 명 쯤은 될 것이야.”

왕원은 안주도 없이 연거푸 독주를 들이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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