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소금 밀매업자의 반란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이 완전히 진압되었다. 두 전란 이후 당나라는 어렵게 명맥을 이어갔으나 국정 운영 전반에 어려움이 극심하였다. 당 조정은 안사(安史)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전국에 번진(藩鎭)을 확대하 여 각 지역에 파견된 절도사(節度使)들에게 병권(兵權)과 행정권을 위임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전국 40여 지역의 절도사들이 점차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면서 당왕조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행보를 취하려 들었다.

당 조정에서는 이들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고 그들을 조정의 명에 따르도록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에 당나라 황제 이현(李儇)은 강력한 중앙군사조직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재정이 문제였다. 국 가 재정을 담당하고 있는 중신들은 세수(稅收) 확보를 위한 묘수를 찾아 내야 했다. 다급해진 황제는 중신들을 압박하였다.

“폐하, 빈약해진 국고를 채우는 방법은 세금 밖에 없습니다. 상서성 (尙書省)과 호부(戶部)에 명을 내려 지금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걷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라 명하소서.”

황제를 그림자처럼 호종하는 환관 전령자(田令孜)가 아뢰자 다른 중 신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령자의 눈 밖에 나면 그날로 벼슬에서 쫓겨나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하기 일쑤였다. 황제의 명에 따 라 상서성과 호부에서 고민한 끝에 지금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이는 방책으로 새로운 세수방안을 고안해 냈다.

그것은 바로 염세(鹽稅)였다. 가뜩이나 전란으로 피폐해진 염상(鹽商)들의 재정은 황제의 가혹한 징 세에 파탄 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환관들과 문벌귀족 그리고 신흥관 료들이 징수방법을 두고 날로 첨예하게 대립하여 정국을 더욱 혼란스럽 게 하였다.

“이대로는 더 이상 못살겠다. 황제를 갈아치워도 뾰족한 수가 없을 것이다. 이참에 당 왕조를 엎어버려야 한다.”

당 조정의 가혹한 세금 정책에 반항하는 민란이 전국에서 들불처럼 번 지기 시작하였다. 874년 하남(河南) 지역에서 소금 밀매업자 왕선지(王 仙芝)가 군사를 일으켰다. 이듬해 산동 지역에서도 소금장수 황소(黃巢) 가 봉기하였다.

“나 왕선지는 허수아비로 전락한 황제와 조정의 벼슬아치들을 믿을 수 없소이다. 나는 분연히 일어서서 썩어빠진 당 왕조를 엎어버리고 백성들이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새나라를 만들고자 합니다.”

왕선지는 스스로 천보평균대장군 겸 해내제호도통이라고 칭하고 당 왕조의 무능을 규탄하며, 백성들에게 봉기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는 격문 을 돌렸다. 순식간에 수만 명의 농민들이 민란에 가담하였다. 안사의 난 이후 당의 조세제도는 초기에 도입된 조용조(租庸調)에서 덕종(德宗) 황제 때 양세법(兩稅法)으로 바꾸었다.

조용조는 농민의 파산, 균전제의 붕괴 및 빈부의 급격한 분화를 불러와 다른 세법이 필요하였다. 양세법은 농민들이 소유하고 있는 농지의 양과 질에 따라 6월에 하세 (夏稅)와 11월에 추세(秋稅)로 나누어 세금을 내도록 하는 제도였다. 그 러나 당 조정은 양세법에 의한 세수만으로는 번진의 운영에 드는 막대한 재정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고심 끝에 당 조정은 부족한 세수를 확보하기 위하여 중신 제오기(第五琦)를 염철사(鹽鐵使)로 임명하고 소금에 대하여 전매제도를 실시했다. 이 전매제도는 전국의 소금을 국가가 매수하여 관리들이 직접 운반 또는 판매하고 민간의 소금 밀조 및 밀매를 금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새 전매제도 실시 초기에는 소금 가격이 1두당 10문이었으나 소비세 100문을 붙여 110문을 받았으며, 가격이 점차 인상되어 소금 1두당 300 문에 이르렀다. 소금 가격의 폭등은 당 조정이 재정이 악화될 때마다 소금 가격을 올렸기 때문이다. 소금 가격이 원가의 30배까지 오르자 밀매 업자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당 조정에서는 밀매업자를 염적(鹽賊) 이라 하며, 규제에 나섰고 적발되면 엄하게 처벌하였다.

“나 황소는 무능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지금의 황제를 용서할 수 없소 이다. 뿐만 아니라 황제 뒤에 숨어 온갖 못된 짓을 저지르고 있는 환관들 과 일부 무능한 고관대작들 역시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군사를 일으키고 자 합니다. 당 왕조는 지난 이백년 동안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버텨 왔습니다.

진작 망할 당나라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소금 장사들이 낸 세금 덕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황제는 소금을 가지고 장난질 을 치고 있어 만백성들이 살 수 없도록 하고 있습니다. 썩어빠진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만듭시다. 여러분, 나를 믿고 따르시오. 새 나 라를 만듭시다.”

황소의 사자후는 그를 따르는 백성들의 가슴을 후벼 팠다. 황소의 말 한마디는 황제의 명령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왕선지의 봉기 소 식을 접하고 산동지역의 소금 장수인 황소가 일으킨 민란도 기세가 대단 하였다. 평민 출신인 황소는 소금 밀조와 밀매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 다.

그는 호전적인 북방 사람들을 돈으로 회유하여 민란에 가담시켰다. 황소는 어려서부터 당 왕조에 불만이 많았다. 여러 번 과거시험에 낙방 한 경험이 있는 그는 배경이 없이는 과거에 합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고 더욱 당 왕조를 불신하게 되었다. 그는 과거 시험을 포기하고 장안을 떠나면서 지은 칠언절구 시의 결구(結句)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滿城盡帶黃金鉀(만성진대황금갑) 온 성이 황금 갑옷 두르리.

위기감을 느낀 소금 밀매업자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당 조정에 대 항하기 위하여 황소의 난에 가담하였으며 군자금을 지원하였다. 당 조정의 염적 토벌은 오히려 대규모 반란으로 이어졌다. 왕선지와 황소는 서 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봉기군을 지휘하였다.

“전국의 절도사들에게 명하여 왕선지와 황소의 반란군을 토벌하라 하시오.”

“폐하, 절도사들이 예전 같지 않사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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