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신라의 희망

부인은 울면서 견일에게 하소연 하였다. 견일도 아기의 탄생이 하늘의 계시임을 알고 하 인들을 풀어 아기를 찾아 나섰지만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며칠을 헤매고 찾아 다녔지만 아기의 행방은 묘연했다. 견일이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아 기를 버린 바닷가를 다시 찾아가고 있을 때 어디선가 아이가 글 읽는 소 리가 들렸다.

“앗, 이 소리는 분명 아기가 글을 읽는 소리렷다.”

“나으리, 저 바다에 있는 바위섬에서 소리가 들립니다요.”

하인들이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갔을 때 이상한 노파가 나타나 견일을 꾸짖었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크고 엄숙하던지 견일은 범상한 노파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얼른 엎드렸다.

“저 아기가 북두칠성의 네 번째 별인 문창성(文昌星)의 화신인 것을 모르고 버리려 하였더냐? 하늘이 최씨 집안에 고귀한 인연을 맺게 주선 하였느니라. 그 아기는 삼한뿐만 아니라 만국에 그 문명(文名)이 창대할 지니 귀히 여기고 정성을 다해 키워라. 황금돼지는 심상(尋常)한 영물이 아니니라.”

견일이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잘못하였다고 빌었다. 한참 있다가 견일 이 고개를 들어 노파를 보려고 하였는데 노파는 보이지 않고 파도 소리 만 들릴 뿐이었다. 견일은 아기가 문창성의 화신이라는 노파의 말에 북 쪽 하늘을 올려다보며 절을 하였다. 아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온 견일은 아기의 이름을 치원(致遠)이라 지었다.

치원은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총 명했다. 일람첩기란 말이 그를 두고 한 말이었다. 무슨 책이든 한번 읽으 면 모두 기억하였다. 10살도 안 되어 어른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사서삼 경을 통달하여 스승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치원은 총명할 뿐만 아니라 글씨를 잘 쓰기로 이미 평판이 자자하였다. 스승도 치 원의 일취월장하는 모습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 개를 이해하는 신동이었다.

“청출어람은 너를 두고 하는 말이다.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구나.”

최견일은 아들을 가르칠 스승을 찾아 다녔다. 서라벌에서 제법 이름 난 선생들도 치원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해보고는 모두 고사하였다. 명민 한 아들을 보며 견일은 여러 달을 두고 고민하다 당나라 유학을 생각하 였다. 견일은 전라도 옥구(沃溝)의 지현사(知縣事)로 있었다.

그는 비록 변방 지방에서 관리로 재직하고 있으나 진골이 아니어서 더 이상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없음에 절망하고 있었다. 견일은 영특한 아들 치원의 앞 날이 걱정되었다. 아들이 아무리 영특하다고는 하나 벼슬길에 나가면 6 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위 직책인 아찬(阿飡)까지 밖에 오를 수 없었 다. 견일은 골품제에 묶여 더 이상 고위직에 오를 수 없는 귀족 중심의 배타적인 신라의 고품제도에 좌절하였다.

‘치원이를 당나라로 유학을 보내야겠어. 아들에게 나의 전철을 밟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야. 신라에서는 아들이 제 뜻을 펼치지 못하고 일찍 좌절하고 방황하게 될 것이야. 그렇지 않으면 왕권에 도전하려는 진골세 력들에게 이용만 당할 수 있어.’

신라 조정에서는 매년 견당유학생을 뽑는 시험을 치렀다. 선발은 상 급, 중급, 하급으로 분류하는데 신라에서 내로라하는 가문의 자제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이 시험에 통과하면 전액 국비로 공부를 할 수 있는 제 도였기 때문에 경쟁이 무척 치열하였다. 당나라에 유학가려고 선발시험 에 10번 응시하였으나 10번 모두 낙방하여 자살하는 유생도 있었다.

그러나 치원은 겨우 12살에 처음 치른 선발시험에서 최상급으로 선발되어 당나라 유학 길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였다. 선발시험은 과거나 마찬가지였다. 12살짜리가 선발된 경우는 처음이었다. 서라벌에서는 치 원은 이미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네가, 견일의 아들 치원이로구나. 장하도다. 듣던 대로 문창성(文昌 星)이 신라에 강림한 것이 틀림없도다. 과인이 너에게 거는 기대가 크단다. 너는 세신(世臣)의 가문에 태어났으니 당나라에 유학 가거든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공부하거라.”

신라왕 김응렴은 어린 천재 치원을 궁으로 불러 다과를 베풀고 격려하 였다. 그러나 일부 진골출신 중신들과 고관대작들 그리고 그들의 자식 들은 치원을 시기하거나 질투하였다. 868년 봄, 치원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장보고가 세운 완도에 있던 청해진(淸海鎭)이 문성왕(文 聖王) 때 혁파된 후 서해의 중심부인 당은군 당성진(唐城津)이 대당 무 역의 전진기지로 번성을 누리고 있었다.

견일과 그의 부인 그리고 치원 의 형 현준이 당성진에 나타났다. 치원과 함께 견당유학생에 뽑혀 당나 라로 향하는 학생 수십여 명이 부모 형제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느라 항구는 부산했다. 유학생 중에서 치원이 가장 어리고 키도 작았다. 부모 품에서 한창 귀여움을 받으며 뛰어 놀 나이였다.

“에구 치원아, 너를 당나라로 떠나보내고 내가 어이 살꼬? 집안 걱정일랑 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거라.”

치원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손을 놓지 못하고 눈물을 훔쳤다.

“어머니, 소자 걱정은 마세요. 일심으로 공부만 하겠습니다.”

치원은 오히려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드리고 불안해하는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나무아미타불. 치원아, 부디 몸조심해야 한다. 내가 할 일을 네가 하는구나. 너에게 언제나 부처님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기도하마.”

“형님, 고맙습니다. 부처님과 불제자인 형님께서 저를 지켜주실 테니 안심이 됩니다. 부모님과 가문 어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형님, 제가 신라에 없으니 형님께서 가끔 어머님과 아버님을 찾아뵙고 위로의 말씀을 드리세요. 부탁드립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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