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신라의 천재 당나라 유학가다

형 현준은 얼마 전에 머리를 깎고 불제자가 되었다. 아버지 견일은 큰 아들 현준만 보면 서운함과 안타까움으로 남모르게 한숨을 내쉬곤 했다.

“아버님, 소자, 당나라로 떠납니다. 존체 만안하심을 빌겠습니다.”

“치원아, 당나라에는 신라뿐만 아니라 발해, 왜나라, 토번, 월지국, 거 란, 서역의 대식국 등 많은 나라에서 유학생들이 몰려든단다. 당나라 장 안은 네가 상상도 못해 본 곳이다. 그곳은 세상의 모든 악과 선이 공존하 는 곳이기도 하다. 오직 한 곳만 보고 정진하거라.

十年不第卽非吾子也行矣勉之(십년불제즉비오자야행의면지) 네가 십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자 식이 아니다. 꼭 성공하기 바란다.”

견일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는 12살 아들에게 할 말이 아니라는 것 을 잘 알면서도 단호한 자세로 아들에게 공부에 전념할 것을 주문하였 다. 매정하지만 견일은 나라와 가문을 위하여 어쩔 수 없었다. 치원이 유학을 떠나기도 전에 신라 왕실과 서라벌에서는 그가 빈공과에 장원급제 할 것이라는 기대가 팽만해 있었다.

견일은 그 같은 기대가 오히려 부담스럽고 마음의 짐이 되었다. 만약 아들이 왕실과 고국의 동포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자신뿐만 아니라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결과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치원을 태운 배가 항구를 빠져 나갔다.

그의 어 머니와 형 현준은 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부두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견일은 어린 아들에게 모진 말을 한 것이 후회되었다. 그는 남몰래 떠나 가는 배를 바라보며 눈물을 훔쳤다.

신라 조정에서 최초로 당나라에 국비 유학생을 보낸 것은 640년 선덕 여왕 때였다. 주로 진골 계급의 자제들을 당나라 국자감에 보내 공부를시켰으며, 이후로 많은 신라 출신 학생이 숙위학생이란 이름으로 유학하 였다.

이때는 신라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에서도 귀족가문의 자제들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세 나라 유학생간에 경쟁이 치열하였다. 신라가 삼국 을 통일하고 난 뒤부터 본격적으로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내기 시작하였 는데 이때는 5두품 자제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신라는 삼국 일통 후에 대폭 늘어난 국가조직과 이 조직을 운영할 인 재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에 신문왕(神文王)은 국학(國學)이라는 교육기관을 설치하였고 원성왕 통치기간에는 국학에 독서삼품과(讀書 三品科)를 병설하였다.

국학은 5두품 이상의 자제들에게만 입학 자격이 주어져 6두품 이하의 사람들에게 불만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에 6 두품 이하의 자제들은 신분의 상승과 장래를 위하여 사비를 들여 개별적 으로 당나라에 유학을 가기도 했다.

신라에서 파견된 국비 유학생의 체 류기간은 보통 10년 정도였고 신라로 귀국한 유학파 학생들을 질자(質 子)라 불렀다. 그들은 당나라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에서 공부를 하 였다.

국비 유학생의 경우 유학하는데 드는 경비는 국고에서 보조하였고 먹고 입는 경비는 당나라의 홍로사(鴻魯寺)라는 기관에서 전담하여 유 학생들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당나라 유학생은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외교사절 역할도 수행하였다. 그들은 유교, 불교, 음양학, 역학 등 당의 문물을 신라에 전파하는 문화 사절 역할도 수행하였다. 유학생들에게는 신라의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골품제도를 벗어나 자유롭게 수학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빈공과 에 합격한 자 중에는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는 유학생들도 있었으나 대개 가 외관(外官)의 말직(末職)에 한정되었다.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친 유 학생들은 대부분 신라로 돌아오게 되는데 진골들의 홀대로 인하여 귀국 을 미루거나 당나라에 눌러 앉는 사람도 있었다. 신라 유학생들은 귀국 한 뒤에 외직이나 문한직(文翰職)에 임명되었다.

최치원은 현자무가(懸刺無暇)와 인백기천(人百己千)이라는 고사를 만들어 냈다. 현자무가는 치원의 공부하는 방법으로 졸음을 쫓기 위하 여 끈을 이용하여 상투를 천장에 매달고(懸) 바늘로 허벅지를 찔러 가며 (刺) 잠시도 쉴 겨를 없이(無暇) 스스로를 독려하였다.

인백기천은 사람 들이 백번하면 나는 천 번 하겠다는 뜻이었다. 천재라 할지라도 게으르 면 둔재가 되기 마련이다. 치원의 나이가 너무 어려 국자감의 정규반에 서 공부할 수 없었다. 국자감에서는 신라에서 유학 온 신동을 위하여 특 별히 예비과정을 만들어 공부하도록 배려하였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님과 칠성님께 비나이다. 신라국 서라 벌 최씨 가문의 어린 자손 치원이 만리타국 당나라 장안에 가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가 무탈하게 지내도록 도와주시고 나라와 가문의 명예를 빛내도록 도와주소서.”

치원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들이 당나라로 떠난 뒤부터 매일 새벽 하 루도 빠짐없이 장독대에 정화수를 올려놓고 천지신명과 북두칠성에게 치성을 드렸다. 부부는 아무리 사나운 비바람이 치고 추운 날씨라도 치 성을 빠트리는 법이 없었다.

“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를타야 훔. 부처님의 한량없는 자비와 지혜의 힘으로 행여 있을지 모르는 아우 의 죄업을 씻어주시고 아우가 정진할 수 있도록 자비를 베푸소서.”

불제자인 현준 역시 세속의 아우를 위하여 부처님 전에 빌고 또 빌었 다. 치원과 같이 당나라에 간 일부 미욱한 신라 유학생들은 공부보다 장 안의 화려한 겉모습에 더 관심을 보였다. 밤이면 끼리끼리 모여 주루(酒 樓)를 찾아 환락을 찾고 살거리가 투실한 기녀를 품으며 외로움을 달래 기도 하였다.

그들은 치원보다 서너 살 위였고 신라에 있을 때부터 술 맛 과 기녀들의 요분질에 이골이 나있었다. 치원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그들은 자기들끼리 어울려 홍등가를 찾았다. 어떤 유학생은 음종한 기녀에게 홀려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몽땅 잃기도 하고 포악한 포주를 만 나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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