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붓으로 발해(渤海)를 꺾다

세월은 쏜살같이 흐르고 있었다. 당나라 국자감에는 여러 나라에서 몰 려든 유학생들이 함께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라출신 유학생들 과 발해에서 온 학생들 간에 경쟁이 무척 치열하였다. 그들은 공부에 있 어서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드디어 치원도 국자감에 입학할 수 있는 나 이가 되어 정식으로 국자감 학생의 신분이 되었다. 국자감에서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 중에 발해인 오소도(烏炤度)와 신라인 이동(李同)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치원과 함께 숙위유학생에 선발된 김 가기와 최승우도 좋은 성적을 보였다. 그들은 치원보다 서너 살 위였고 국자감 입학도 몇 년 앞서서 했다. 국자감에서는 매년 서너 번 중간시험 을 보는데 오소도와 이동이 수석을 놓고 선두다툼을 벌였다.

시험 때만 되면 누가 수석을 차지하느냐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중간시험에서 오소 도가 수석을 차지하면 다음번에는 이동이 수석을 차지하였다.

당나라 심장부 장안에서 신라와 발해의 두 청년이 나라의 명예를 걸고 붓으로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유학생을 가리키는 교수들도 두 편으로 갈리어 신라와 발해의 자존심을 건 두 청년의 공부를 지도하느라 혈안 이 되어 있었다.

곧 있을 빈공과의 본 시험인 진사과(進士科)에 누가 장 원으로 급제하느냐가 장안에서 뿐만 아니라 발해와 신라의 조정에서도 최대 관심사가 되어 있었다.

황제가 참가한 가운데 치러진 진사과 시험 에서 발해인 오소도가 당당하게 장원을 차지하여 발해의 위상을 높였다. 응시생 중 반수 이상이 신라 출신 유학생들이었다. 당 황제는 장원을 차 지한 오소도를 치하하며 상을 내렸다. 치원은 아직 시험 볼 자격이 없었다.

신라인이 발해인에게 뒤지다니 이번 일은 신라의 수치로 역사에 영원 히 남을 것이다. 결과를 지켜보던 치원은 충격을 받고 탄식하였다. 이동이 장원을 차지할 것이라고 기대를 하던 신라 출신 유학생들뿐만 아니라 신라 조정도 큰 충격을 받았다. 발해 유학생에게 장원을 빼앗긴 신라유 학생들은 울분을 감추지 못하고 한동안 방황하였다.

드디어 치원에게 다 음번 진사과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치원은 하루 종일 공부에만 매달린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나은(羅隱)과 고운(顧雲)이라는 당나라 문인(文人)을 벗으로 두었다. 그들은 국자감에서 함께 공부를 하 다가 뜻이 맞아 자주 교류를 하게 되었다.

나은과 고운은 어린 나이에 멀 리 타국에 와서 공부에 전념하는 치원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지은 시문을 교환하며 문우(文友)의 정을 다져나갔다.

秋風唯苦吟(추풍유고음) 가을바람에 괴로이 읊조리나 / 世路少知 音(세로소지음) 세 상에 알아주는 이 없네 / 窓外三更雨(창외삼경 우) 창밖엔 밤 깊도록 비만 내리는데 / 燈前萬里心(등전만리심) 등 불 앞에 마음은 만리 밖 고향을 향하네

“해운(海雲), 지난번에 우리에게 보여준 추야우중(秋夜雨中)은 절창이었소.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구려.”

“해운, 너무 외로워하지 마시구려. 우리가 있지 않소.”

웬만해서는 남을 인정하지 않는 시인 나은은 치원이 쓴 시를 보고 감 탄하였고 고운 역시 치원의 문재(文才)를 칭찬하며, 치원을 알게 된 것 을 큰 영광으로 여기고 있었다.

“과찬입니다. 두 분은 당나라에서 알아주는 시문의 귀재 아니십니까?” 최치원 역시 나은과 고운을 알게 된 것에 감사하며 우정을 돈독히 하 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해운이 외로워하는 기색이 있으면 득달같이 달 려와 말벗이 되기도 하고 학문을 토론하며 우정을 다졌다.

“해운, 곧 진사과 시험이 있을 예정입니다.”

“신라를 떠나 장안에 온 지 어언 육년이 다 되어 갑니다. 저는 이번 시 험에 응시하고자 합니다. 처음 보는 시험이라 많이 떨리기는 합니다.” 최치원은 10년 내로 빈공과에 급제하지 못하면 부자지간을 끊겠다는 아버지의 당부를 늘 가슴 속에 새기고 있었다.

“해운은 이미 장원급제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중간시험을 볼때 마다 최고의 성적으로 필명을 날리지 않았습니까?”

“고운의 말이 맞습니다. 국자감 유학생 중에는 해운의 능력을 따를 자 가 없습니다. 국자감 교수들도 해운에게는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고 합 니다.”

강파른 성질의 나은과 수더분한 고운은 침이 마르도록 해운의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세 사람은 차를 들면서 정담을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874년 건부(乾符) 1년 갑오 1월에 당 조정의 예부시랑 배찬(裵瓚)이 주관하는 빈공진사과(賓貢進士科)가 치러졌다. 이 시험에서 18세의 신라인 최치원이 처음으로 시험에 응시하여 당당하게 장원을 차지하며 급 제하였다.

당나라에는 ‘三十老經五十少進士(30노경, 50소진사)’란 말이 있다. 과거 예비시험인 명경(明經)은 30세에 따면 늙은 편이고 과거 본 시험인 진사는 50세에 따도 젊은 편이란 말이 있었다.

그만큼 진사 급제 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단적으로 대변하는 말이다. 2년 전 발해인 오소도에게 빼앗긴 신라의 자존심을 되찾은 것이었다. 해운 최치원이 장 원을 차지한 소식은 금방 당나라 수도인 장안뿐만 아니라 멀리 고국인 신라의 서라벌까지 전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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