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황제에게 등을 돌리는 절도사들

“폐하. 당 왕조를 재건할 기회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사옵니다.”

“전령자의 말이 맞소이다. 이제 어찌해야 좋습니까?”

사천 지역으로 피신 가서도 당 황제 이현은 여전히 모든 일을 환관인 전령자에게 일임하고 있었다. 황제가 신책군(神策軍) 500명과 일부 신 하만 대동하고 사천지역으로 피신한 것은 전령자가 사천 지역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폐하, 즉시 각 지역 절도사들에게 군사 동원령을 내려 장안성으로 집결하라는 성지를 내리소서.”

전령자가 미욱한 당 황제에게 아뢰었다.

“절도사들에게 파발을 보내 짐의 뜻을 전하시오. 절도사들이 직접 휘 하의 군사들을 이끌고 장안으로 오라하시오. 짐이 직접 점고를 해야겠습 니다.”

황제의 성지가 각지의 절도사들에게 전해졌으나 이미 망국의 길로 접 어든 당 왕조를 위해 움직이는 절도사는 서너 명 밖에 없었다. 황제는 절 도사들의 항명에 충격을 받았지만 그대로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당 황 제는 전국의 절도사들이 여전히 자신의 신하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절도사들은 이미 황제의 명을 받는 관리들이 아 니었다.

당 왕조를 배신한 절도사들은 자신이 관할하던 지역의 거대 군 벌이 되어 그 지역을 통치하며 왕이나 다름없는 행동을 하였다. 미약해 진 당 조정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은 영남, 서도, 하서, 산남, 검남 지역 등 황제의 총애를 받던 자들이 절도사로 있는 지역 뿐이었다.

절도사 중에 대표적인 군벌로 성장한 자들은 선흡의 진언(秦彦), 절동 의 유한굉(劉漢宏), 태원과 상당을 차지한 이극용, 봉상의 이창부(李昌符), 회남의 고변(高駢), 하양과 낙양을 장악한 제갈석(諸葛爽), 허채의 진종권(秦宗權), 치청의 왕경무(王敬武) 등 이었다. 그들은 병권과 행정 권을 장악하고 지역에서 왕처럼 행세하고 있었다.

황제의 성지를 받고 행동을 보인 절도사는 회남을 장악하고 있는 고변뿐이었다. 다른 절도사 들이 움직이지 않자 고변은 군사를 거두고 본거지인 양주로 돌아가 사태 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는 하나의 화살로 날아가는 두 마리 기러기를 맞출 정도로 명궁이면서 호쾌한 무인이었다.

또한 그는 문재(文才)도 뛰어나 시(詩)를 잘 지어 문인들과 교류가 많았으며 그의 집에는 늘 문객들 이 기거하고 있었다.

수십 명이나 되는 절도사 중에서 시를 쓰고 창작활동을 하는 등 문무 를 겸한 자는 고변이 유일했다. 고변은 도통순관으로 승차한 해운 최치 원이 어떤 사람이며 무슨 재주가 있는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특히 해운이 시재(詩才)도 갖춘 유능한 인재라는 말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자신에게 충성을 하며 열심히 일하는 신라인 해운 최치 원에게 고변은 최대한의 예의로써 대하였다.

한편으로 고변은 해운이 선 주(宣州) 율수현위를 역임하였다지만 아직도 당나라 문물에 서툴고 당 인(唐人)들의 속을 잘 알지 못할 거라 걱정이 앞서기도 하였다. 고변은 해운이 올리는 각종 문서를 꼼꼼히 검토하였지만 사족이 될 만한 흠결은 찾아볼 수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 그대에게 무척 애정을 갖고 계시오, 지난번 폐하께서 절도사들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장안으로 집결하라는 조서를 내렸을 때 도통사가 보여준 충정에 폐하께서 감동을 받으셨소.”

여름이 중반으로 접어들 무렵 황제의 측근인 전령자가 은밀히 고변을 찾아 왔다. 그는 고변에게 황제의 밀조를 건넸다. 밀조의 내용은 고변이 앞장서서 장안에 똬리를 틀고 웅크리고 있는 황소를 조속히 토벌하라는 내용이었다.

“내 휘하의 군사만으로 황소의 대군을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전 령자께서 나와 연합하여 장안성을 공격할 다른 지역 절도사를 연결해주 시오. 아니면 군사를 충원해주시던가요.”

고변이 예고도 없이 찾아온 전령자에게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예전에는 고변이 감히 전령자에게 대들 수 없었다. 음험한 전령자의 눈밖에 나면 지방으로 좌천되거나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병사가 많다고 반드시 전쟁에서 승리하는 건 아니오. 폐하께서 그대 를 제도행영병마도통사에 임명하셨으니 이제는 제대로 이름값을 해야 지요. 그대가 문무에 뛰어나다고 들었소이다. 그대가 다스리고 있는 회 남지역 여덟 주는 다른 지역에 비해 사정이 좋습니다.

지금 장안 백성들 은 서서히 황소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하더이다. 지금이 장안을 회복할 수 있는 적기입니다. 석 달 내로 장안성을 함락시키고 황소의 목을 베어 황제 폐하께 바치도록 하시오. 이것은 나의 부탁이며 황제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의뭉스러운 전령자는 고변을 노려보았다.

“일단 폐하의 어명이 계시니 군사를 움직여 황소를 토벌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석 달은 너무 촉박합니다.”

고변은 먼 하늘을 바라보며 건성으로 대답하였다. 고변이 머뭇거리자 전령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반드시 그놈을 잡아 죽여야 당 왕조가 재기할 수 있습니다. 황제 폐 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장안성에 종묘와 황실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번에 고도통이 큰공을 세워보시오. 고씨 가문에 영광이 있 을 겁니다.”

전령자는 착살맞게 황제 이현이 내리는 밀조를 건네고 휑하니 가버렸 다. 고변은 전령자가 간 뒤에 군관 회의를 소집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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