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해후

“내가 예전에 율수의 현위로 있을 때 어떤 쌍녀분에 가서 지은 시가 갑자기 떠올라 읊어 볼 테니 혹시 팔낭과 구낭이 그 시를 들어본 적이 있 으면 대구를 이어 보도록 하세요.”

해운은 잔을 비우고 나서 박자에 맞춰 천천히 시를 읊었다.

 誰家二女此遺墳(수가이녀차유분) 뉘 집에서 두 여인의 무덤을 남겼을까,

해운이 첫수를 읊고 나서 팔낭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배시시 웃더니 입을 열었다.

寂寂泉 扃 幾怨春(적적천경기원춘) 적막한 황천에서 얼마나 봄을 원망할까.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더란 말이냐? 아니면 예전에 하룻밤 사랑을 나 누고 아쉽게 헤어진 팔낭과 구낭이 양주까지 나를 찾아온 것인가?’ 영문을 모르는 고운은 손으로 탁자를 탁탁 쳐가며, ‘좋다’하는 소리로 추임새를 먹이면서 연신 술잔을 비워댔다.

해운은 침을 꿀꺽 삼키며 팔 낭과 구낭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어서 해운이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 세 번째부터 일곱 번째 시구를 읊었다.

 孤館若逢雲雨會(고관약봉운우회) 초현관에서 운우를 나눌 수 있다면.

해운은 구낭을 바라보았다. 구낭은 미소를 짓더니 여덟 번째 시구를 읊었다.

與君繼賦洛川神(여군계부락천신) 그대들과 더불어 낙신부를 지어 노래하리.

‘아, 그렇다면 이 두 여인이 내가 율수현위를 지낼 때 하룻밤 만나 운 우지정을 나눴던 그 장씨 집안의 자매가 분명하다. 내가 이곳에 있는 것 을 알고 찾아 온 것이 틀림없어.’

해운은 4년 만에 만난 팔낭과 구낭을 바라보면서 감격해 하였다. 자매 는 해운이 이제야 자신들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아 본 것에 고무되어 뺨 이 붉게 물들며 배시시 웃었다.

술독 열개 중 벌써 다섯 독이 비었다. 해운과 고운 그리고 팔낭(八娘) 과 구낭(九娘)은 지상에서 최고의 아름답고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 다.

두 사내가 각자 자신이 지은 시를 읊고 나면 자매는 노래와 춤으로 흥을 돋웠다. 나중에는 여자 악사 두 명이 들어와 향비파와 얼후를 연주 하며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반주에 맞춰 팔낭이 노래하고 구낭이 반나체 차림으로 요염하고 관능적인 춤을 추었다.

두 미인의 춤과 노래 에 자극을 받은 탓인지 고향을 떠나 멀리 객지에서 힘든 생활을 하는 두 사내의 잠자고 있던 춘정(春情)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술잔을 기울이 던 고운이 일어나 구낭의 실버들처럼 여리고 야들야들한 허리를 껴안고 함께 춤을 추었다.

고운은 해운에게 미치지는 못하지만 역시 상당한 미 남자였다. 남녀의 행복에 겨운 웃음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갔는지 요지의 여주인과 다른 객실에 들어 있던 기녀들이 몰려와 해운이 들어있는 객실 을 몰래 훔쳐보기도 하였다.

“내가 십년만 젊었어도 길차게 생긴 남자들을 상대할 수 있을 텐데.” “언니, 오른쪽에 앉아 있는 분이 신라에서 오신 해운 최치원이란 분이시죠?”

“이것아,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마. 저분은 하늘이 내신 분이셔. 문창성의 정령이 사람으로 화해 신라 땅에 태어나신 거래.”

“그러니까 더 욕심이 생긴다고요. 당나라에는 어째 저런 미남자가 없는 것일까? 잠시라도 함께 있으면 좋으련만-.”

어떤 기녀는 내실의 환상적인 광경을 엿보면서 몸을 비비꼬기도 하고 또 어떤 노기(老妓)는 한숨을 토하며, 해운이 들어 있는 내실에 들어갈 수 없는 자신의 신세를 탓하며 무척 아쉬워하였다.

“저 두 신선님들은 팔낭과 구낭이 딱 어울려. 잘 봐라. 저 네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노는 모습이 마치 벽에 걸려있는 신선도 같지 않니?”

“팔낭과 구낭을 나오라고 하고 우리가 들어갑시다. 샘나서 못살겠어 요. 나 이러다 상사병 걸릴 것 같아요. 나 죽으면 언니가 책임지셔요.”

“멍청아, 저 두 신선님들과 어울리려면 즉석에서 절구와 율시, 부, 곡, 송 등 다양한 형태의 시문(詩文)을 짓고 그림도 그릴 줄 알아야 해. 뿐만 아니라 양귀비처럼 춤도 출 줄 알고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 같은 노래 도 능수능란하게 부를 수 있어야 어울릴 수 있어.”

이제는 다른 객실에 들어 있던 남자 손님들까지 몰려들어 난리법석을 떨었다.

“이것들아, 어서 객실로 들어가 손님들 시중들어. 그러다 손님들 그냥 가버리면 어쩌려고 그래. 술값 못 받으면 너희들이 물어야 해.”

기녀들은 각자의 객실로 돌아가면서 여주인에게 눈을 흘겼다.

“기녀 생활 삼십년이 되도록 저런 미남자들을 한 번도 손님으로 받아보지 못했으니 나도 어지간히 남자 복이 없는 년이구나.”

다른 손님들 시중들던 기녀들이 돌아가고 여주인은 해운이 들어있는 객실 안의 요지경 속 같은 모습을 훔쳐보느라 오랫동안 자리를 뜨지 못 했다.

“잠시 쉬었다가 놉시다. 내가 정신이 없구려.”

고운이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고운이 자리에 앉자 마자 자매는 그에게 매달려 쉴 새 없이 술잔을 안겼다. 고운이 이미 대취 한 듯 했는데도 자매가 건네는 술잔을 마다하지 않고 호기롭게 받아 마 셨다.

“고운님, 참으로 멋지세요. 어쩜 춤을 그리도 잘 추셔요?”

구낭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고운은 크게 웃으며 연신 술잔을 비웠 다. 해운은 고운이 폭음을 하는 것 같아 불안하였다. 대취하여 불미스러 운 행동이라도 한다면 두 사람의 체면이 땅에 떨어지고 안 좋은 소문이 나면 신분상 큰 손해를 입을 것 같았다.

객실 안에 술독이 두 개 밖에 남 지 않았다.*계속

 

저작권자 © 남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