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또 한번의 운우

“물론 수재님의 문장으로도 황소를 충분히 놀라게 하고 병들게 하여 민란을 잠재울 수 있으나 더 빠른 효과를 위해 저희 자매가 수재님을 돕 고자 합니다. 황소는 나라를 혼란에 빠트린 당 황실과 백성들의 철천지 원수입니다.

조속히 그와 그를 따르는 검은 세력들을 제압하지 않으면 수많은 백성들이 계속해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죽어 갈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백성들이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희 자매는 동포들이 죽어가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없어 수재님께 부탁드리는것이니 저희 마음을 헤아려 주세요.”

멀리서 새벽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창이 서서히 여명에 물들고 있었다. 해운은 4년만의 해후를 술을 마시느라 허비한 것 같아 안타까웠 다. 자매는 해운의 마음을 알았는지 수줍게 웃었다.

“수재님은 영원한 저희 자매의 정인(情人)입니다. 얼마 뒤 수재님께서 신라로 돌아가시더라도 저희 자매는 신라로 가서 수재님을 그림자처럼 따르며 보호해드릴 것입니다. 또한 먼 훗날, 수재님께서 피안에 드시면 저희 자매가 태상노군과 서왕모께 간곡히 청하여 진인(眞人)의 반열에 올려드릴 것입니다.”

“그럼, 내가 훗날 신선이 된단 말입니까?”

해운은 신선이 된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해운은 고변을 상관 으로 모시면서 그에게서 도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많은 도교관련 서적 을 읽으며 신선의 세계를 동경하게 되었다.

“이 객실 뒤에 있는 침상은 특별하답니다. 수재님께서 잠시라도 자리에 드셔야 내일 맑은 정신으로 사무를 보실 수 있습니다.”

해운이 휘장을 살짝 젖히고 뒤에 있는 침상을 보았다. 어른 서너 명이 동시에 편하게 누울 수 있는 화려한 침상이 있었다. 침상 위에 봉황 무늬 가 수놓인 황금색 이불이 깔려있고 베개 3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침 상을 보자 해운은 끓어오르는 춘정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빨리 처소로 달려가 격문을 다시 써야 했다.

“새벽닭이 울었습니다. 빨리 돌아가서 격문을 다시 써야 합니다.”

“수재님께서 그냥 가신다면 저희 자매는 큰 슬픔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부디, 잠시만이라도 함께 있어주세요.”

팔낭이 은근히 해운의 소매를 잡았다.

‘병마도통께서 어제 올린 격문을 보기 전에 다시 써서 올려야 하는데…….’

해운은 4년 전 있었던 환상적인 운우를 생각해 냈다. 팔낭의 간절한 눈 빛은 벌써 슬픔으로 변하고 구낭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흐느꼈다. 해운은 자매의 청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 꿈결 같은 순간순간이 이어졌다.

세 명의 청춘남녀 가 벌이는 환상의 율동은 과연 요지경 속의 광경이었다. 아마 누가 우연히 세 사람이 펼치는 장엄한 모습을 보았더라면 그는 심 장이 멈추거나 혹은 순간 기혈이 막혀 죽음에 이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세 청춘의 유려하고 신비한 행동은 세 사람을 동시에 극락으로 이끌고 있었다. 순간이 곧 영원으로 이어지고 그 영원은 또 다시 아쉽고 안타까 운 순간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세 사람이 열락을 만끽하고 아쉬운 이별 을 할 때 까지 방안에서는 끊임없이 도교 경전과 주문을 낭송하는 소리 그리고 간간이 두 여인이 토해내는 절정의 묘음(妙音)이 흘러 나왔다.

“해운, 나 혼자 남겨 놓고 먼저 가면 어떻게 하나? 그리고 팔낭과 구낭 의 머리를 올려주려고 찾았더니 두 자매는 아침 일찍 본가에 갔다는군. 도대체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야? 나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다네.”

점심때가 다 되어서 고운이 퉁퉁 부운 얼굴로 나타났다. 해운이 팔낭 과 구낭의 머리를 올려주고 처소로 돌아와 격문을 다시 써서 고변에게 올리고 난 뒤였다.

문자의 파괴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말은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 의 청자(聽者)가 있어야 전달이 기능하지만 문자는 상대방이 반드시 있 어야 할 필요가 없다. 천 년 전에 선조께서 문자를 이용하여 지은 시문을 천년이 지나서 후손이 읽고 감동을 받는다.

문자이기에 가능하다. 그러 나 천 년 전 선조가 한 말은 후손들이 알 수가 없다. 한자(漢字)는 어느 한 민족의 전유물이 아니다. 청동기 이후 동이족의 앙소(仰韶) 문화권에 속하는 여러 부족이나 민족이 공용으로 사용하였다. 단지 익히고 쓰는 과정이 지난한 면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이것이 정말로 내 휘하에서 일하고 있는 신라인 해운 최치원이 작성한 격서란 말이냐?”

“태위 어른, 분명히 해운이 쓴 글이 맞습니다. 해운이 이 격문을 쓰느 라 낮밤을 꼬박 지새웠습니다. 격서를 다 썼을 때 해운이 소직(小職)에 게 먼저 보여주면서 서평을 의뢰하였습니다.”

격황소서를 읽어본 제도도통검교태위 고변은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격서는 사람이 썼다고 볼 수 없네. 귀신이 아니고서는 이 같은 문장이 나올 수 없어. 제갈량이 위나라와 일전을 치 르기 위해 전장에 나가기 전에 촉한의 후주(後主) 유선(劉禪)에게 올린 출사표도 이 격문을 따라가지 못하네.”

고변은 속에서 열이 나는지 자꾸만 냉수를 찾았다.

“그렇습니다. 공명의 출사표는 밋밋하고 너무 감정에 치우친 면이 있 습니다. 그에 반해 해운의 격문은 읽는 사람의 심장을 뛰게 만들어 역적 황소에게 적개심을 품게 하고 병장기를 들고 금방이라도 전장으로 뛰쳐 나갈 마음을 갖게 합니다.

또한 서너 군데 인용한 고사(古事)의 전거는 황소의 만행을 규탄하고 회유하는 문장으로 가히 하늘의 문장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고운이 해운을 칭찬하자 고변은 덩달아 고무되어 몸이 달아오를 지경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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