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최치원의 격서 두 황제가 보다

“그런데, 갑자기 내 몸이 이상하네. 이 격서를 읽고 난 뒤로부터 심장을 예리한 비수에 찔린 느낌이야. 그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띵한 것이 금방이라도 내가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태위 어른, 이 격서는 문창성의 정기를 받은 해운의 혼(魂)이 서려 있 습니다. 이 글이 당사자를 만나면 피를 토하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즉, 황소가 직접 이 격문을 본다면 즉사할 수도 있습니다.”

고운은 한 술 더 떠서 고변에게 겁을 주었다.

“옳거니, 자네 말이 맞네. 그런데 이 격문 서두에 제도도통검교태위와 내 이름이 들어갔는데 내 이름을 빼고 싶네. 해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 어서 그러네. 나는 시문이나 몇 줄 쓰는 수준이라네. 이 격서가 전국에 붙으면 남들이 부하의 실력을 훔쳤다고 나를 욕할까 두렵네.”

고변은 계속해서 속이 불편한 지 얼굴에 경련까지 일면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고(告)하는 분은 당연히 태위 어른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을 텐데 굳이 이름을 뺄 필요가 있습니까?”

늘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던 고변이 왜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빼라고 하는 지 고운은 이해할 수 없었다. 평생 공명(功名)만을 추구하던 자가 자신의 이름을 빼라고 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때 해운이 헛기 침을 하며 집무실로 들어왔다.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님, 어서 오시게.”

고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해운의 두 손을 잡았다. 예전에 볼수 없었던 행동이었다.

“수고했네, 정말로 수고했어. 어떻게 이틀 만에 완벽한 천의무봉을 재 단할 수 있었나? 나는 도저히 믿기지 않네. 과연 해동성국 신라의 해운 일세. 빈공진사과 장원급제한 문재가 맞네.”

해운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신의 손을 잡고 연신 헤프게 웃고 있는 고변이 이상했다.

“태위 어르신, 과찬이십니다. 그냥 한번 써봤습니다.”

“나도 문장을 좀 쓴다고 우쭐거리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내가 본 문장 중에서 자네의 격문이 최고 일세.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네. 격문 첫머리 에 있는 내 이름 두 자를 빼주면 안 되겠는가?”

고변은 간곡하게 자신의 이름을 삭제해 달라고 하였다.

“네에? 이 격문을 황소에게 통보하는 주체는 태위 어르신이십니다.”

“알지. 알고말고. 그냥 나의 직함만 쓰고 이름 두자는 지워주시게.”

해운은 고변의 요구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의 요구대로 ‘고변’을 지우고 모관(某官)으로 대신 하였다.

“만약 내 이름을 쓰면 나의 실력을 훤히 알고 있는 문사(文士)들이 입방아를 찧을 거야.”

고변은 해운이 격문을 수정하는 것을 보며 들릴 듯 말 듯 혼자서 중얼 거렸다. 해운이 격문을 수정하여 고변에게 건네자 그의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졌다.

“새로 작성한 격문 원본을 사자(使者)를 시켜 황소에게 직접 전달케 하고 필사본 삼천 장을 만들어 전국의 절도사와 근왕병, 군현령 등에게 빠짐없이 보내도록 하시게. 또한 사천에 몽진하고 계신 황제 폐하께도 보내시게.”

고변은 두통과 한열(寒熱)로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다. 태위 고변의 명에 따라 사자가 해운이 작성한 격문 원본(原本)을 가지고 직접 황소가 있는 장안으로 향했다. 또한 필사본 3천장이 만들어져 양주는 물론 전국 모든 지역에 최치원이 작성한 ‘격황소서’가 전달되었다.

“오, 과연 고변이로다. 태위가 시문을 제법 잘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지만 문장에도 이렇듯 빼어난 재주가 있는 줄 몰랐도다.”

“폐하, 고변은 과연 당 나라 태위입니다.”

“남자의 가슴을 뛰게 하고 용기백배하도록 가슴을 후벼 파는 문장은 소신도 처음 봅니다. 과연 당나라의 보배이며 자랑입니다.”

사천에 있던 황제 이현도 고변이 보낸 격문을 받아 보고 중신들과 함께 침이 마르도록 그를 칭찬하였다.

“폐하, 그자의 머리통에서는 그 같이 빼어난 문장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이 격문은 그의 휘하에 있는 자가 쓴 것이 분명합니다. 고루한 늙은이 머 리에서 이 처럼 용사비등한 서체와 심오한 문장이 나올 수 없습니다. 소 신이 고변의 필적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자의 시문은 아기자기하고 오 밀조밀하여 마치 초조(初潮)를 막 시작한 계집애들이나 쓸법한 어휘들 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격문을 썼단 말이오?”

고변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전령자가 한 마디 하자 다른 중신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황제는 격문을 쓴 자가 과연 누구인지 궁금하였다. 중신들 중 몇몇은 고변 휘하에 신라인 최치원이 종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해운의 문장은 이미 당 나라 문인들과 고관들에게도 꽤 알 려져 있었다. 황제에게 외국인이 격문을 썼다고 말할 경우 그가 불편하 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격황소서가 당나라 전역에 전해지면서 당나라는 들끓었다. 어떤 사람은 고변의 필력을 침이 마르도록 극찬하였고 또 어 떤 자들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고변의 문장이 아니라고 떠들어 댔다. 이제는 과연 그 격서를 누가 썼느냐가 당나라 지식인들에게 최고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폐하, 제도도통검교태위란 자에게서 이상한 문서가 도달하였습니다.”

황소는 대장군 주온(朱溫)과 재상인 상양(尙讓) 등을 대동하고 장안성 에서 가까운 야산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 명목상은 사냥이지만 장안성 에 갇혀 있다시피 한 황소가 무척 답답해하자 대장군 주온의 건의로 바람 을 쐬러 나온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장안과 낙양에 자주 출몰하던 당 황제의 근왕병들도 모두 어디로 갔는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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