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황소 전의(戰意)를 상실하다

“아니래. 황제 측근이 그러는데 고변이 지은 게 아니고 그의 휘하 부관이 작성한 거래. 그자의 이름이 뭐래더라? 아, 최 뭐라 하던데.”

“아, 그 자라면 열두 살 때 신라에서 건너와 빈공과에 장원급제한 수재해운 최치원을 말하는 거 아닌가?”

“맞아, 천하의 문장가라고 소문났다고 하네.”

장안에는 벌써 황소가 고변이 보낸 격문을 읽다가 말에서 떨어져 중상 을 입고 자리에 누었다는 소문이 왁자하게 퍼져 있었다. 그런데 몇몇 사 람은 격문을 쓴 사람이 고변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대다수 사 람들은 고변이 쓴 것으로 알고서 그를 칭찬하는 소리가 매일 이어졌다.

고변은 졸지에 구국의 명사(名士)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황소는 자리 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의, 짐의 심장에 비수가 박힌 것처럼 숨을 쉴 때마다 말할 수 없는 통증이 이어지고 두 눈에서 피가 계속 나오는데 멈추질 않는다.

그리고 밤마다 두 요귀가 나타나 짐을 희롱하여 한 순간도 잠을 이룰 수 없도다. 심지어 꿈속에서도 그 요귀들이 나타나니 도대체 짐이 갑자기 왜 그런 것인가? 속 시원히 말 좀 해보거라.”

황소는 며칠사이에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살이 빠지고 머리가 백발이 되었으며, 두 눈은 10리쯤 움푹 들어가 있어 이미 이승 사람의 모습이 아 니었다.

“폐하, 소신이 사람의 질병을 연구하고 치료한지 어언 육십년이 다 되 었지만 그 같은 증세는 처음 접하여 무어라 말씀드릴 수가 없사옵니다. 무엇인가에 크게 놀라신 것 같은데 마땅히 처방할 수 있는 약이 없사옵 니다.”

“뭐라, 약이 없다?”

“소신이 보기에는 마음의 병 같습니다. 가슴에 담았던 모든 것들을 훌훌 털어버리면 씻은 듯 나을 수도 있습니다.”

어의의 말에 황소는 자신의 지난날들을 돌아보고 한숨을 쉬었다.

‘천하 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조차도 짐을 죽이려고 모의한다니? 도대체 그 고변 태위가 어찌 그 같은 문장을 쓸 수 있단 말인가? 나도 문 장에는 일가견이 있는데 그가 어떻게 나의 심장에 비수를 꽂는 문장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그의 문장은 인간의 경지를 넘어 이미 천상의 수준에 도달하였도다.

내가 왕유, 한유, 이백, 두보, 잠삼(岑參), 가도(賈島), 유종원, 백거이 등 당나라의 내로라하는 문장을 모두 보았지만 모두가 유려하고 과장이 심한 미사여구로 덧칠한 문장들만 나열했을 뿐이거늘 고 변의 격문은 사람을 숙연하게 만들고 논리 정연하여 감히 내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도다.

나는 그만 마음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가 다시 소금 장수나 해야겠다. 괜히 고집피우다 정말로 귀신들 손에 죽을지 도 몰라.’

황소는 격황소서를 다시 한 번 떠올리면서 몸서리 쳐댔다.

문자는 종이나 돌, 쇠, 목재 등에 새기거나 써놓음으로써 불특정 다수 에게 의사를 전달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시인이나 문장가는 반영구적 인 의사전달 체계 수단인 문자에 자신의 마음과 혼을 담아내는 예술가이 며, 문자를 조탁하는 마술사라고 할 수도 있다.

문자를 알면 누구나 문장 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희로애락을 글로 묘사하는 재주는 하늘이 정한 자 아니면 가질 수 없다. 동이족이 발명한 한자(漢字)는 글자 하나 하나가 언어의 음과 상관없이 일정한 뜻을 지닌 표의문자로 풍성한 의미 를 지니고 있어서 시문(詩文)이나 제술에 있어 뛰어난 기능이 있다.

“그게 정말입니까?”

“폐하, 소신이 몇 번이나 확인하고 또 확인하였습니다. 황소가 고변 태 위가 보낸 그 격문을 읽다가 피를 토하며 말에서 떨어져 자리에 누웠다 고 합니다.”

“과연, 고변 태위는 하늘이 짐에게 보낸 충신이로다.”

이현 황제는 박장대소하며 좋아하였다.

“폐하, 소신이 알아본 바로는 격황소서는 고변이 쓴 것이 아니고 그의 휘하에 있는 도통순관승무랑전중시어사내공봉인 신라인 최치원이 쓴 것 이 확실하다고 하옵니다. 당초에 최도통순관이 격문 초두에 제도도통검 교위태위 고변으로 써서 올렸는데 고변이 이름을 빼고 모관(某官)으로 수정하라고 하였답니다.”

전령자가 황제에게 아뢰자 황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다른 대신들도 전령자의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폐하, 행재도지휘처치사 전령자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소신들도 이미 알아보았습니다. 고변이 자신의 이름 두자를 삭제하고 대신 ‘모관’으로 고치라 하였답니다.”

다른 중신이 아뢰자 황제는 그제야 고개를 주억거렸다. 전령자는 회심 의 미소를 지으며 황제의 반응을 살폈다. 전령자와 고변은 지난번 회동 때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갈등을 빚고 있었다.

“짐도 시문에 관심이 많아 시경(詩經)과 초나라 굴원(屈原)부터 시작 하여 설도(薛濤)와 어현기(魚玄機)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시문들을 읽어보았지만 신라인 최치원의 ‘격황소서’ 만큼은 아니었다.

비록 우리 당나라 사람은 아니지만 외국인으로서 귀기가 감도는 빼어난 문장으로 흉악하고 패악무도한 역적 황소를 한 번에 망가트렸으니 천군만마를 지 휘하는 장수보다 위대하도다. 지금 짐에게 가장 든든한 신하가 바로 신 라인 최치원이다. 변란이 끝나면 짐이 그를 후하게 칭송하고 상을 내릴 것이다.”

웬만해서는 외국인에게 칭찬하는 법이 없던 당 황제 이현은 침이 마르 도록 신라인 해운 최치원을 칭송하였다. 중신들도 황제의 극찬은 당연한 처사라고 입을 모았다.

황소가 최치원이 작성한 격문을 보고 병이 난 뒤 로 그의 위세는 땅에 떨어졌다. 황소를 따르던 장졸들의 이탈이 빈번하 면서 황소가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괴소문까지 나돌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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