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뇌주의 추격

“대왕, 그 아이를 그냥 두세요. 한 번만 나의 청을 들어주세요.” 왕비가 왕에게 애걸복걸하였지만, 왕은 차갑게 돌아섰다. 이미 그에게는 도설지라는 자식은 없었다. 아들이 아니라 나라를 팔아먹을 반역자나 다름없었다.

“뇌주는 태자 일행을 잡아 오너라.” 양화왕비가 격노한 이뇌왕을 붙잡고 하소연하였지만, 왕은 노발대발하면서 왕비를 책망하였다. 왕비가 아무리 울면서 하소연해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뇌왕은 큰아들 뇌주(腦朱)에게 군사를 내주고 빨리 도설지와 태자비를 체포하라고 명했다.

뇌주는 이뇌왕과 가비(伽妃)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왕이 양화왕비와 혼인하기 전에는 가비가 반파국의 왕비였고, 뇌주는 태자였다. 가비와 뇌주는 신라와 반파국 사이에 체결된 혼인동맹의 희생양이기도 했다.

도설지와 뇌주는 이복형제지간이지만 견원지간이나 마찬가지였다. 뇌주는 기마병을 이끌고 도설지 뒤를 쫓았다.반파국은 백제와 신라의 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양국의 간섭이 심했다. 신라가 반파국과 맺었던 혼인동맹을 일방적으로 깨뜨렸지만, 정치적 교류만 없을 뿐 민간교역 및 왕래는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었다.

장차 남삼한을 통일할 야망을 품고 있는 백제와 신라 양국에게 반파국은 제1순위로 정복해야 할 대상이기도 했다. 금관가야가 신라에 합병된 뒤로 가야연맹을 주도하고 있는 반파국의 움직임은 신라와 백제에게 관심의 대상이었다.

반파국이 주도하여 가야연맹이 친 백제로 돌아서자 신라는 큰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비록 혼인동맹이 깨지기는 했으나, 반파국이 가야연맹을 주도하여 친 백제로 돌아설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양국의 중심추 역할을 해온 반파국이 모든 국정을 친 백제 성향으로 돌리면 나머지 가야국들도 따르게 마련이었다. 소가야와 고령가야가 아무리 친 신라 정책을 고수한다고 하여도 한계가 있었다. 두 소국(小國)이 가야연맹을 탈퇴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연맹회의에서 표결에 부쳐 결과가 나온 이상 두 소국도 결과에 승복해야 했다. 연맹에서의 이탈은 곧 멸망으로 이어지고, 지도층과 백성들은 한때 연맹이었던 반파국이나 아라가야, 성산가야의 노예로 전락할 공산이 컸다.

“네가 반파국의 태자 도설지가 맞느냐?”

신라 매금왕은 중신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신라로 귀순한 도설지 일행을 맞이하였다. 그 자리에는 왕비인 보도부인(保刀夫人)도 있었다. 도설지의 생모 양화왕비와 보도부인은 아버지는 다르지만, 같은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난 자매 지간이었다.

매금왕의 전대(前代) 왕인 소지마립간(炤智麻立干)의 정비는 선혜부인(善兮夫人)인데, 보도부인은 소지마립간과 선혜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고, 도설지의 생모 양화왕비는 선혜부인과 신라의 귀족인 호조공(好助公) 사이에 태어났다.

선혜부인은 지아비가 있었음에도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꽃보다 아름답고 색도(色道)에 뛰어난 묘심랑(妙心郞)과 사통하였다가 왕후에서 폐위되었다. 이후에도 선혜부인은 홍기공(洪器公), 호조공과 관계를 맺었다. 소지마립간은 폐위된 왕후가 낳은 자식들은 해코지하지 않았다. 보도부인은 도설지에게 이모였고, 매금왕은 이모부가 되었다.

“소인이 반파국 태자 도설지가 맞사옵니다. 소인은 부왕과 다른 가야국 왕들이 연맹회의에서 백제로 전향(轉向)하기로 결론을 맺어 신라로 넘어왔습니다. 소인과 함께 온 일행이 신라에서 살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소인은 부왕의 친 백제 정책을 따를 수 없었사옵니다.”

도설지가 이모부 뻘 되는 신라왕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매금왕은 도설지와 아랑 그리고 세 호위무사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잘 왔다. 신라는 너의 외가(外家)이니라. 너뿐만 아니라 태자비와 함께 온 일행들도 서라벌에서 살도록 하여라.”

매금왕은 일어나서 도설지의 손을 잡아주었다. 헌헌장부의 도설지를 처음 볼 때부터 신라왕은 도설지가 외탁(外託)하였음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왕이 도설지를 마치 사지에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아들을 대하는 듯 반기자 왕비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도설지, 참으로 잘 왔다. 내가 너의 이모이니 앞으로 잘 지내보자꾸나. 사람은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 좁고 답답한 가야보다 넓고 배울 것이 많은 신라가 너에게는 어울릴 것이야. 이제부터는 신라의 신하가 되어 대왕에게 견마지로를 다해야 한다.

또한, 아랑이도 이제 신라인이 되었으니, 지아비를 지극 정성으로 받들고 서라벌에 마음을 붙여야 한다.”

보도부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다. 그녀와 신라왕 사이에는 딸 지소공주(只召公主)가 있었으나, 왕의 친동생인 갈문왕(葛文王) 김입종(金立宗)과 혼인한 상태였다. 왕비는 신장(神將) 같은 도설지의 풍모에 반해 그에게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만약 지소공주가 미혼이었다면 보도부인은 당장에 도설지를 사위로 삼으려 했을 것이었다. 신라왕은 도설지에게 우선 벼슬을 제수하여 6부병에 소속시켜 궁성을 방어하는 임무를 보게 하였다. 왕은 도설지의 충성도를 보며 차츰 그의 관등을 올려줄 생각이었다.

신라의 직제는 17관등으로 이루어졌는데, 최고위의 순위는 각간인 이벌찬(伊伐飡), 이찬, 잡찬, 파진찬, 대아찬(大阿飡), 아찬, 일길찬, 사찬(沙飡), 급벌찬, 대나마, 나마, 대사(大舍), 사지, 길사(吉士), 대오(大烏), 소오, 조위(造位)였다.

그러나 군대 직제는 일반 관등과 약간 달랐다. 급벌찬 이상은 신라군의 지휘관인 장군으로 진골 출신의 자제만 될 수 있었다. 군대는 나라의 근간이므로 왕은 6두품이나 5두품 등 일반 평민의 자제에게는 제수하지 않았다. 도설지의 생모 양화왕비는 신라 진골 출신이므로 도설지도 머지않아 진골이 될 확률이 높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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