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문(回轉門)안에서
 김일곤

문의 행위는 소통의 손짓이다
네 개 방으로 구성된 소통의 통로는
열림과 닫힘으로 구체화된다
회전문의 몸놀림은 호기심으로 딱 안성맞춤,
하지만 들고 보면 구속의 틀
본디 문은 자유로움과 여유롭고 싶지만
몸통이 큰 빌딩일수록 여닫이문보다 회전문을 선호한다
환대라기보다 박대 방식이다
나는 빨리 들어가고 싶은데, 느릿느릿 걷고도 싶은데
나오는 이의 보폭에 맞춰야 하고
나오는 이는 들어가는 이의 속도에 맞춰야 하는 이율배반 속이다
들어오는 사람과 손이라도 잡고 싶은데
나는 그의 등을 떠밀고 그는 내 등을 떠미는
배척의 투명한 거리가 있다
열림을 가장(假裝)한 닫힘의 혀가 날름거린다
자동회전문은 한 수 더 뜬다
박자를 놓치면 놓친 만큼 더 구속이다
은근하게 솟아오르는 이 뜨뜻한 분노,
판옵티콘의 원형구조가
통제하고 조율하는 섬뜩함이 있다
가진 이들이 열 줄 모르는 소유욕과
들어오는 사람을 자기 입맛에 맞추는 강요가 있다
문명을 굴절시키는 회전문 안에 갇혀
나는, 오늘도 어지럽다

시의 여러 요소 중에서 가장 어렵고 중요한 것은 시적표현일 것이다. 공부를 많이 하여 이론에 강한 분들도 순간적으로 시를 소설처럼 허무맹랑하게 쓰게 되거나 수필을 잘라서 행만 바꾸어 놓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이 시가 눈에 띈 것은 발상, 전개 등 처음부터 끝까지 시적표현으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막힌 시 한편을 읽고 더위에 미루었던 감상문을 서둘러 쓰고 있다.

커다란 건물에서 문은 소통이라는 합리적인 전제와 편리함을 내세운 회전문이 건물의 강요와 이기심과 구속을 숨긴 비틀린 소통이라는 발상이 새롭다. 이러한 비틀린 소통이 문화를 구부린다는 이 작가는 세상을 보는 칼날 같은 눈을 지니고 있어 매력적이다.

독자는 강자와 약자도 상상하게 되고, 옷자락에 숨긴 이율배반적인 세상의 발톱도 공감하게 된다. 수정된 시가 더 좋으나 같은 맥락이므로 원시를 올렸다.

시는 소설처럼 뜬금없거나 수필처럼 설명해도 안 될 것이다. 고귀하게도 시는 평생 만나도 질리지 않도록 늘 새로운 언어를 치렁치렁 달고 있어야 하고 발칙하고 예쁜 상상력을 갖고 있어야만 지속적인 사랑을 받는다.

좋은 음악을 듣고 나면 한동안 귓가에 메아리처럼 맴돌듯이 이 시를 보면서 얼마나 시가 예민하고 상상력과 직관이 필요한지 공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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