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신라의 매금왕

“무력 형님을 따른다면 진골들이 가만둘까요? 가야 출신 끼리 합쳐 모종의 일을 꾸민다고 별의별 모함을 들을 수도 있을 텐데요?”

“그런 걱정은 하지 말게. 내가 고구려와 대치 중인 전선에 나가 큰 공은 아니지만 자주 신라군을 승리로 이끌었네. 자네와 내가 호흡이 잘 맞는다고 고하면 왕께서도 승낙하실 거네.

우리가 가야 접근지역에 나간다면 당연히 왕과 조정 중신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보고 승낙하지 않겠지. 금관가야가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허약해지자, 반파국과 신라 사이에 맺어진 혼인동맹이 깨지면서 그 불똥이 금관가야로 튀었지.

나와 아버님 그리고 우리 삼 형제는 아직도 가슴 속 깊은 곳에 신라에 대한 한(恨)이 자리하고 있네. 자네도 그 불행한 역사를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어.”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김무력이 현재는 신라의 장군 벼슬을 제수받았지만, 조국 금관가야를 아주 잊은 것은 아니었다. 김무력은 망국의 한을 달래며, 신라에 복수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본인의 휘하에 있는 얼마 안 되는 군대를 일으켜 서라벌로 진격해 봐야 초전에 박살 날 것이 뻔했다.

자칫 그의 불충한 행동으로 서라벌에 있는 구형왕과 형제들이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김무력은 당대가 아닌 후손을 통해 신라에게 보기 좋게 통한의 복수를 희망했다.

그것은 이미 멸망한 조국 금관가야를 원래대로 복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후손이 신라의 핵심 인물이 되거나 왕비가 되어 신라의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것이었다.

“무력 형님, 신라 위정자들의 진정한 속내가 어떤 것입니까? 답답합니다. 저의 외가가 신라 왕실이지만 조국 반파국을 도외시(度外視)할 수는 없습니다. 형님이 보시기에 장차 가야연맹이 어떤 길을 갈 것으로 판단하십니까?”

“이 집 술맛이 서라벌에서 최고라네. 미인들도 많고. 우리 오늘 모주망태가 되어보세. 세속의 일을 자꾸 생각하면 머리만 아프네.”

도설지의 물음에 김무력은 엉뚱한 말로 응수했다. 그는 망국의 왕자로 도설지의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신라 왕실이 도설지에게 공을 들이고 있는 이유는 그가 신라 왕실의 핏줄인 이유도 있었지만, 장차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신라의 배후에 있는 가야를 정벌해야 했다.

그 첫 시작이 바로 금관가야의 합병이었다. 그러나 위로 고구려와 이웃 백제가 버티고 있어 가야연맹 전체를 정벌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매금왕은 평범한 군주가 아니었다. 그는 불교를 국교로 공인하였고 율령을 반포하여 신라가 고대국가로 흥기하는데 노력하였다.

이는 신라가 건국 초창기부터 6부의 집단이나 소국들로 구성되어 있던 형태를 완전히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제 신라왕은 평범한 6부의 수장(首長)이 아니라, 나라를 통치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자가 되었음을 공표한 것이었다.

신라인들은 매금왕이 불교를 공인하기 전까지 토속신앙을 신봉하였다.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로 불교를 거칠게 반대하던 중신들과 6부의 세력들을 잠재울 수 있었다.

“형님, 저는 신라왕의 마음을 알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삼맥종을 만나보시게.”
“삼맥종이 누구입니까?”

신라로 귀순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도설지는 신라 왕실의 복잡한 혼인 관계를 잘 몰랐다. 도설지는 반파국에 있을 때부터 어머니 양화왕비를 통해 신라 왕실의 얽히고설킨 혼맥(婚脈)을 들은 적이 있었지만, 자세한 사항은 알지 못했다. 골품제(骨品制)는 신라 왕실을 떠받치는 근간이었다.

골품제는 여덟 개의 계층으로 구성되었다. 최상위 계층은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로 구분되었다. 그 아래 계층은 여섯 개의 신분층이 존재하였다. 신라 상류사회는 혈통의 높고 낮음에 따라 관직, 혼인, 옷을 비롯한 사회생활 전반에 걸친 행동 범위와 한계를 정한 제도였다.

골품제는 세습성이 강하고 배타성이 심하여 신라 지배층 사이를 반목과 질시를 유발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나나 자네가 어쩌면 평생을 받들어 모셔야 할지도 모를 사람이네. 아직은 나이가 어리지만, 장차 신라의 왕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큰 인물이라네. 그는 매금왕의 친동생 *갈문왕 김입종(金立宗)의 아들이지. 왕과 정비 인 보도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지소공주밖에 없는데, 지소공주가 왕의 동생 김입종에게 시집가서 낳은 아들이기도 하네. 그러니까 갈문왕 김입종은 왕의 친아우이면서 사위이지. 왕이 갑자기 붕어하면 왕위가 누구에게 가겠나? 안 봐도 뻔 하지 않은가?”

* 갈문왕 - 신라시대 왕과 일정한 관계를 가진 성씨 집단의 최고 씨족장 또는 가계(家系)의 장에게 주어진 칭호.

 김무력은 반쯤 취한 듯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의 잔이 비워지기 무섭게 옆에 앉아 있는 기녀가 그의 잔에 독주(毒酒)를 가득 채웠다. 김무력은 두주불사였다. 망국의 한을 술과 고구려를 두들겨 패는 것으로 풀고 있는 것 같았다.

‘삼맥종이라, 김삼맥종. 나의 인생이 그에게 걸려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뿐만 아니라, 가야연맹 전체의 운명이 그 어린 왕실 자손의 손에 있을지도 모르겠어. 조만간에 인사차 갈문왕 댁을 방문해야겠다.’

두 사내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자 곁에 있던 해어화(解語花)들은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두 기녀는 연신 하품을 해대며, 두 사람의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했다.

“두 분 장군님들, 이제 딱딱한 이야기는 그만하시고, 저희와 어울려 춤도 추시고 노래도 부르시면서 즐기셔요. 인생 뭐 있어요? 그저 국으로 먹고 마시고 마음에 맞는 임을 만나 밤낮으로 정분(情分) 나누면 그게 가장 행복한 인생이라고요. 김장군님, 이년 말이 틀리지 않죠?”

한 기녀가 김무력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 아양을 떨었다. 기녀는 까칠한 수염에도 불구하고 김무력에게 입을 맞추고 술잔을 들어 먹여주기도 했다. 김무력은 기녀의 행동에 그저 너털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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