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신라의 희망 김삼맥종

 “노래 좀 불러 보거라.” 김무력의 요구에 기녀가 일어나 즉석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한 기녀가 춤을 추었고, 이에 흥이 발동한 김무력도 일어나 기녀의 허리를 껴안고 춤을 추었다.

 회소, 회소, 이긴다 한들 무어랴
회소, 회소, 진다 한들 무어랴
인생은 무상하고 세상은 저리 태연히 흐르는데
바람인들 구름인들 제 몫을 온전히 지녔을까
아서라 말아라 탐하지 말고 구하지 말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그렇게 흐르면 되는 것을…….

기녀가 부르는 회소곡(會蘇曲)은 신라 제3대 유리왕 때 지어진 노래이다. 왕이 육부(六部)를 둘로 나누어 왕녀(王女) 두 사람에게 부내(部內)의 여자를 거느리도록 하여 길쌈을 할 때 부르도록 한 노래였다. 서라벌의 밤은 무척 짧은 듯 했다.

도설지는 김무력을 만나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도설지가 아무리 왕비인 보도부인(保刀夫人)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하지만, 신라 왕실의 속내를 알 수는 없었다.

그가 반파국의 태자 신분으로 신라에 귀순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큰 약점이 되기도 했다. 가야와 조금이라도 인연이 닿거나 가야 관련한 일을 하는 관리 아니면 도설지와 조금이라도 말을 섞지 않으려 했다.

“소신, 왕비님의 부름을 받고 들었습니다.” “조카야, 앞으로는 신라 왕실에서 조카를 월광태자(月光太子)라 부르기로 했다. 월광태자, 월광태자. 수백, 수천 번을 들어도 참으로 아름다운 호칭이야. 신라는 대왕이 불교를 국교로 공인하였으니, 이제는 불국토나 다름없다. 월광태자라는 호칭은 부처님 전생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는구나. 대왕과 내가 상의하여 지은 이름이니 기껍게 받아주었으면 좋겠구나.”

보도부인은 시녀가 내온 꿀물을 도설지에게 따라주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도설지가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다른 이름을 지어주려고 했다.

“소신도 그 이름이 좋습니다.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소신이 죽을 때까지 그 이름을 사용하겠나이다.” 보도부인이 월광태자에 관한 전설을 자세히 말해 주었다. 보도부인의 이야기를 듣는 도설지의 속이 쓰리기만 했다.

한 왕국의 왕이 아들을 보았는데, 그는 아들에게 월광(月光)이라 이름 지어주었다. 월광은 궁궐에서 부족한 것 없이 금지옥엽으로 자랐다. 월광이 크면서 부왕은 그를 태자에 봉(封)했다. 태자가 어느 날 시종들을 거느리고 외출을 하게 되었다. 태자가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아픈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나병(癩病) 환자였다. 환자는 태자 일행을 보고 달려가 자신의 병을 하소연하며 도와달라고 하였다. 태자가 의사를 불러 물어보니, 환자의 병은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는 사람의 혈수(血髓)를 마셔야 고칠 수 있다고 하였다.

태자는 병자의 말을 듣고 즉시 시종에게 자신의 몸에서 살을 헤집고 뼈를 부수어 혈수를 빼내라고 하였다. 월광태자는 자기 신체를 훼손해 가며 환자에게 선행을 베풀었다.

‘하필이면 월광이란 말인가? 나는 아직 절에도 가본 적이 없고 불경을 한 줄 읽은 적도 없는데, 대왕이 나에게 월광이란 별칭을 지어준 이유가 뭘까? 석가모니가 전생에 월광태자로 불렸다면 나에게도 그처럼 조건 없는 희생을 하라는 뜻인가? 이는 나에게 신라를 위하여 충성하란 뜻이나 다름없다. 월광태자, 월광태자…….’

도설지는 보도부인에게 월광태자에 대한 유래를 듣고 착잡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어머니와 동복(同腹) 자매라서 마음을 놓으려고 했던 도설지는 눈앞이 캄캄했다. 그는 신라의 왕비가 느닷없이 월광이란 별칭을 지어준 이유를 어느 정도 감을 잡자 반파국에 있는 생모 양화왕비가 그리웠다.

매금왕이 신년(新年) 들어 자주 앓아누웠다. 어의(御醫)들은 왕이 특별한 증상도 없이 자주 병상에 눕자 고민이 컸다. 왕이 한번 자리에 누우면 보통 보름 이상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먹지 못하자 몸이 마르고 잘 걷지도 못했다.

보도부인은 어의들을 다그치며 왕을 살려내라고 요구하였지만, 왕은 점점 기력을 잃어갔다. 매금왕이 병석에 누운 지 반년만인 7월에 승하하였다. 그가 신라의 왕이 된 지 27년이 되는 해였다.

신라의 6부 집단의 수장들과 조정 중신들 그리고 왕실을 대표하는 인사들이 화백회의(和白會議)에 참석하였다. 지존의 자리는 하루라도 비워두면 안 되었다. 조정에서는 매금왕에게 법흥(法興)이란 시호를 내렸다.

매금왕과 보도부인 사이에 낳은 자식은 지소부인(只召夫人) 한 명뿐이었다. 그런데 지소부인은 왕의 친동생 갈문왕 김입종과 혼인하여 삼맥종, 숙흘종(肅訖宗), 딸 만호(萬呼)를 낳았다. 김입종은 한때 태자에 봉해지기도 했으나, 매금왕보다 빨리 사망하였다.

화백회의에서는 지소부인과 왕의 외손자인 삼맥종, 숙흘종을 놓고 차기 신라의 왕위를 이을 사람을 논했다. 지소부인은 여인의 몸으로 왕이 될 수 없다며 고사하고 대신 큰아들 삼맥종을 강력하게 추천하였다.

화백회의에서는 장고 끝에 삼맥종을 차기 신라왕으로 옹립하였다. 그의 나이 이제 겨우 7살에 신라 제24대 왕에 추대된 것이었다. 지소부인은 태후가 되어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섭정(攝政)하였다.

태후가 된 그녀 뒤에는 어머니 보도왕태후가 있었다. 중신들은 왕이 나이가 어리다고 하여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삼맥종은 나이는 비록 어리기는 하였으나, 생각이 깊고 주변 사람들에게 강온(强溫) 양면을 잘 구사하여 국정을 이끌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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