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관산성으로 달려가다

‘네가 범인을 알 것이다. 범인이 누구인지 어서 실토하라.’

‘나리, 어두운 밤이고, 범인들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상태라 생김새를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저도 범인들과 싸우다 한쪽 팔을 잃었습니다. 제가 범인을 안다면 찾아가 사생결단을 냈을 겁니다.’

‘이놈이 거짓말을 하는구나. 이놈을 매우 쳐라,’

병부 소속 군관의 명령에 나졸들은 항우에게 몽둥이세례를 안겼다. 항우가 아랑과 태손을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만약, 반파국 왕자 뇌주가 보낸 자객이라는 사실을 토설할 경우 월광을 아끼는 보도왕태후는 즉시 군사를 움직여 반파국으로 쳐들어갈 수도 있었다. 반파국에는 항우의 부모 형제뿐만 아니라 양화왕비와 월화공주가 있었기에 더더욱 말할 수 없었다.

항우의 실토는 곧 신라와 반파국의 전쟁을 의미했다. 보름 넘게 항우에게 모진 고문이 이어졌으나,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아랑의 피살 소식을 전해들은 월광은 서라벌로 돌아와 목 없는 두 시신을 끌어안고 대성통곡하였다.

항우로부터 뇌주가 보낸 자객에 의해 아랑이 피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월광은 미칠 듯 날뛰었다. 그는 곡기를 끊고 아랑과 태손 그리고 청조, 백조의 죽음을 애통해했다. 항우의 설득으로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난 월광은 뇌주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였다.

당장 반파국으로 달려가 뇌주를 죽이고 싶었지만, 어머니 양화왕비와 동생 월화공주의 안위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군, 반파국을 조국으로 둔 우리가 어쩌다 서로 갈라져 싸워야 하는 걸까요? 저는 이번 전투에서 뇌주와 왜군 그리고 백제군만 상대할 겁니다. 가야연맹 병사들이 무슨 죄가 있겠어요. 가야연맹의 왕들과 장자들이 결정을 잘못한 탓에 동포들이 전쟁에 동원된걸요.”

“너의 말대로 가야연맹 병사들이 무슨 죄가 있겠느냐? 그러나 나는 신라로 귀순하여 신라군 장수가 되었으니 저들을 상대로 병장기를 휘둘러야겠지. 가슴이 아프구나. 이 모든 게 나라가 힘이 없는 탓이다.”

두 사람이 밤을 새워 관산성으로 달려갈 때 멀리 백제의 사비성(泗沘城)에서 한 떼의 군사들이 관산성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관산성을 탈취한 백제군의 사기를 앙양시키고 백제 연합군 총사령관인 부여창(扶餘昌)을 만나기 위해 이틀 전부터 달려오는 백제 최고위급 인사들이었다.

부여창은 백제 성왕의 장자로 태자에 봉해져 있었다. 성왕은 신라왕 삼맥종이 나제동맹을 일방적으로 깨고 고구려로부터 회복한 욱리하 주변 6개 주를 빼앗은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태자 부여창도 부왕의 진노(震怒)를 가라앉히고 신라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초전부터 백제 연합군은 신라군을 압도하여 관산성을 빼앗고 이어서 서라벌을 향해 진군할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신라군은 고모산성, 삼년산성(三年山城), 굴산성, 관산성을 주요 거점으로 하여 백제와 대치하고 있었고, 백제군은 고리산성, 이백산성(二白山城), 식장산 등을 중심으로 신라와 마주 보고 있었다.

관산성을 손에 넣은 백제 연합군은 기고만장하였다. 그들은 사기가 올라 금방이라도 서라벌로 달려가 신라를 멸망시킬 것 같았다. 부여창은 승전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연합군 장수들과 술을 마시며 자축연을 벌였다.

“뇌주 왕자, 유지신(有至臣) 장군, 이제 우리 백제 연합군의 승리는 확실합니다. 이 밤이 지나고 나면 우리 연합군은 신라의 심장부 서라벌을 향해 진군할 것입니다. 전투에 힘쓴 병사들에게 술과 고기를 마음껏 들게 하고 푹 쉬도록 하세요.”

유지신은 왜의 야마토(大和) 장수였다. 그는 신궁으로 소문난 물부막기무련(物部莫奇武連)과 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筑紫國造) 소장과 부장으로 죽사(竹沙), 물부(勿部), 막기위사기(莫奇委沙奇) 등을 이끌고 백제군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야마토 군은 선봉에 서지 않고 자꾸만 뒤로 빠질 궁리만 했다. 야마토의 긴메이왕(欽明王)은 백제 성왕의 친서를 받고 왜군 일천 명, 군마 일백 필, 전선(戰船) 사십 척과 전쟁 물자를 지원하였다.

가야연맹에서도 백제 성왕의 친서를 받고 상당수의 *보기(步騎)와 전쟁에 드는 물자를 지원하였다. 연합군의 초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초저녁에 신라의 신주 군주 김무력이 신라 진영에 도착하여 관산성에서 후퇴한 신라군과 합류하였다.

김무력은 진영에 도착하자마자 신라왕이 보낸 밀지(密旨)를 받았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대어(大魚)를 낚을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심복 도도(都刀)를 불러 귓속말로 속살거렸다.

* 보기 – 보병과 기마병

“도도, 내 말을 알아들으렷다.”

“장군, 차질 없이 받들겠나이다.”

김무력 휘하에 *고간 도도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신라 삼년산성에 출전하고 있던 군관으로 김무력의 왼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신라 *좌지촌(佐知村)의 *사마노(飼馬奴)로 말을 사육하는 일을 주로 하다가 김무력의 눈에 들고 나서 일취월장했다. 도도는 검술과 창술의 달인이기도 했다. 도도는 김무력의 지시를 받자마자 한 떼의 군사들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고간(高干) - 신라 17관등 중 9관등인 급찬(級飡)에 해당함.
* 좌지촌 – 현, 충청도 보은(報恩).
* 사마노 – 말을 사육하는 노예.

월광과 그의 휘하 신라군대가 동이 틀 무렵에 신라군 진영에 도착하였을 때 예상외로 병사들의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신라군이 백제 연합군에게 밀리고 있음에도 군관들과 군사들의 얼굴에는 적군에 대한 두려움이나 패배감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월광이 신주 군주 김무력을 만나고 나서 그 이유를 거니 챌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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