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새로운 혼인동맹

“성산왕은 말씀해 보시오.”

“대왕이 방금 말한 내용 중 마지막 사안에 대하여 인정할 수 없습니다. 신라의 그 어떠한 요구라면, 나라를 받칠 수도 있단 말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성산가야 왕이 이의를 제기하자 친 신라로 기운 가야연맹과 주변 소국의 왕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그를 잡아먹을 듯 협박성 발언을 마구발방으로 쏟아냈다. 어떤 장자들은 성산가야 왕을 향해 물 잔을 집어 던지며 회의를 방해한다고 욕설을 퍼부었다.

회의장 분위기가 험악하게 돌아가자 이뇌왕은 정회를 선언하였다. 성산가야 왕은 마치 대역죄인이라도 된 양 한쪽에 직수굿하게 앉아서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다.

이미 대세는 친 신라 쪽으로 기운 상태에서 혼자서 아무리 기를 쓰고 반대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이뇌왕이 공표한 안건을 표결에 부치면 결과는 뻔 한 것이었다. 연맹의 왕들과 장자들은 다시 모여 최종적으로 성산가야 왕이 이의를 제기한 부분을 다듬고 성산가야 왕의 동의를 구했다. 연맹회의가 속개되었다. 이뇌왕이 최종안을 발표하였다.

“조금 전에 발표한 내용 중 네 번째 항만 수정하여 발표합니다. ‘넷째로 가야연맹은 신라로부터 그 어떠한 요구라도 적극 수용한다.’를 ‘신라의 요구를 적극 수용한다’로 한다.”

이뇌왕의 발표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었다. 월화공주는 즉시 서라벌로 떠날 채비를 하였다. 이뇌왕은 서둘러 사신단을 꾸리고 즉시 서라벌로 전령을 파견하여 가야연맹에서 사신단이 갈 예정임을 알렸다. 서라벌에서는 한바탕 소요가 일었다. 보도왕태후와 지소태후는 내심 기꺼워하였으나, 신라왕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왕, 가야연맹에서 사신단이 온다는데 어찌 생각하세요?”

신라왕의 할머니인 보도왕태후가 삼맥종 왕의 안색을 살폈다.

“그들은 백제에 군사를 보내 신라를 치려고 했습니다.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가 패하자 백제에 등을 돌리고 우리 신라에 목숨을 구걸하려 합니다. 소손(小孫)은 반드시 가야연맹을 신라영토로 합병시킬 것입니다.”

삼맥종 왕이 확답을 피하자 이번에는 왕의 모후인 지소태후가 소신을 밝혔다. 그녀는 왕의 의중을 잘 알고 있었다.

“대왕, 반파국 왕비는 대왕에게 할머니가 되십니다. 이번에 사신단이 오면서 월화공주도 함께 온다고 합니다. 공주가 대왕에게 인연을 맺기 위해 오는 것이지요. 가야연맹이 백제를 의지하다가 다행히 신라로 전향하였으니 모르는 체하며 받아들이는 것도 괜찮을 듯싶습니다.

백제가 비록 관산성 전투에서 우리에게 패하기는 하였지만, 마음을 놓으시면 안 됩니다. 백제가 고구려나 왜와 다시 손을 잡으면 곤란합니다. 일단 가야연맹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월화공주를 후비(后妃)로 맞아들이세요. 어차피 가야연맹을 복속할 계획이라면 저들을 안심시키는 것도 묘책입니다.

지금 상태에서는 우리 신라가 주변국들을 상대로 소진의 합종책(合從策)이나 장의의 연횡책(連橫策)을 구사할 상황이 아니라고 봅니다. 월화공주가 양화왕비를 닮아 재색이 뛰어나고 성품도 곱다고 하니 대왕하고 잘 어울릴 겁니다.”

모후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삼맥종 왕은 잠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옆에 있던 보도왕태후가 입가에 미소를 담고 왕에게 말했다.

“대왕, 모후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너무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일단 가야연맹을 안심시켜 놓고 기회를 엿보는 것도 좋아요. 우리에게는 김무력과 월광이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그 두 사람을 앞세워 즉시 가야연맹을 치면 됩니다.

그 전에 먼저 불쌍한 가야 백성들을 어루만져 줄 필요가 있습니다. 대왕이 성군(聖君)이라고 소문나면 가야연맹의 왕들은 금관가야의 구형왕처럼 자진하여 나라를 바칠 겁니다.”

신라왕은 할머니와 어머니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다. 두 여인은 정사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어려서부터 듣고 본 것이 많았고, 각종 병서(兵書)의 내용도 훤히 꿰고 있었다. 특히 지소태후는 섭정할 때에도 자주 합종연횡책에 대하여 강조했고 내유외강을 주문하였다.

지금 당장 사기가 올라있는 신라군사들을 가야연맹으로 진격시키면 가야합병은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와 신라왕은 가야연맹이 목표가 아니었다. 신라의 최종 목표는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여 삼한을 통일하는 거였다.

“소자, 할머님과 어머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대왕, 잘 생각하시었습니다. 남자는 때로 여인의 말을 들을 때도 있어야 합니다. 법흥대왕도 이 할미의 말을 자주 경청하셨어요.”

보도왕태후의 얼굴이 봄꽃처럼 활짝 피면서 손자의 손을 잡아주었다. 비록 친손자가 아닌 외손이었으나, 친손자나 다름없었다. 지아비 법흥대왕의 친동생 입종갈문왕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어려서부터 자신을 따르고 의지해온 왕이었다.

“대왕, 그럼, 서둘러 가야연맹 사신단을 맞을 채비를 하시고, 날짜를 잡아 월화공주와 가례(嘉禮) 올릴 준비도 하세요. 혼례는 내가 관련 부서에 하명을 하지요. 그리고 요즘 부여소비가 백제왕이 전장에서 죽은 뒤로 소침해 있습니다.

이제는 북청(北廳)에 묻혀있는 백제왕 부여명농의 목을 백제로 돌려보낼 때가 된 듯 합니다. 너무 오래 백제 백성들에게 원성을 들으면 안 됩니다.”

“소자, 어머님의 말씀대로 조치하겠습니다.”

왕은 병부에 명령을 내려 북청 계단 아래에 묻혀있던 백제왕의 머리를 백제로 돌려보내게 하고, 가야연맹의 사신단을 정중하게 맞으라고 명했다. 갑작스러운 신라왕의 가례 소식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한 사람은 월광 장군이었다.

그는 친여동생 월화공주가 신라왕의 후비(后妃)로 온다는 소식에 기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착잡한 심정을 가눌 수 없었다. 여동생이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신라왕에게 몸을 바치는 것 같아 속이 쓰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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