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 가야의 기화요초

“이번 사태에 대하여 우리 대왕께서는 무척 실망하셨습니다. 부디, 귀국에서 우리 대왕의 마음을 흡족하게 풀어줄 수 있는 시원한 대답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신라의 특사가 양화왕비가 따라주는 술잔을 비우고 점잖게 말했다. 특사는 양화왕비가 신라 왕실 출신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 반파국은 가야연맹의 수장국으로 금번 사태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가야연맹과 주변 소국들은 서라벌 주변 해안으로 군사를 보낸 적이 없습니다. 또한, 아버님의 장삿날 벌어진 반 신라 시위도 역시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나타나 주도하였을 뿐입니다.

또한, 아라가야 아시촌에서 발생한 반 신라 시위사건도 아라가야 백성들은 정체불명 사람들의 사주에 의했을 뿐 가야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벌인 일이 아닙니다. 특사께서는 돌아가시면 가야연맹의 입장을 분명히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뇌주 왕자, 증거가 분명한데도 그리 말할 거요?”

신라의 특사가 벌떡 일어나 언성을 높였다. 이에 양화왕비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변해 몸을 떨었다. 가야연맹의 운명이 달린 일이었다.

“트, 특사님, 뇌주가 잘 몰라서 한 말입니다. 우리 반파국과 가야 나라들이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신라왕께서 요구하는 대로 따를 테니 용서해주셔요.”

양화왕비는 신라의 특사에게 엎드려 우는 목소리로 사정하였다. 그녀는 특사를 잘 달래 고빗사위를 잘 넘기려 했다.

“왕비님, 무조건 잘못했다니요? 저는 왕비님의 말을 따를 수 없습니다. 우리 가야연맹은 하늘에 맹세하건대 절대로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입니다.”

뇌주는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더는 대화가 되지 않았다. 불같은 성격의 뇌주로 인하여 일이 꼬이고 말았다. 특사는 곧바로 반파국을 떠나 서라벌로 향했다.

실질적으로 반파국을 다스리는 뇌주의 속내를 파악한 신라왕과 태후 그리고 조정 중신, 군부 수뇌부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거대한 매지구름 떼가 먼 바다에서 서서히 가야연맹을 향해 다가왔다. 그 구름은 한두 번 바람이 분다고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대왕, 특사가 고한 내용을 잘 들으셨지요? 그들은 잠시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겉으로만 친 신라 정책을 표방했을 뿐입니다. 답은 나와 있습니다. 대왕의 결심만 남았습니다.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신라왕은 어머니 지소태후의 충고를 듣고도 잠시 주저하였다. 물론 그도 신라가 삼한일통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야합병이 절실하다는 것을 알지만 월화궁주와 월광 그리고 반파국의 양화왕비가 마음에 걸렸다. 자신과 월화궁주 몸에서 나온 남매의 처지도 고려해야 했다.

반파국이 망하면 월화궁주와 남매는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가뜩이나 여러 명의 신라 출신 궁비(宮妃)들 사이에서 친정의 일로 고뇌하고 있는 월화궁주가 측은하게 생각되었다.

왕은 친정의 일로 고뇌에 찬 행보를 보였던 백제 성왕의 딸 부여소비의 불행했던 일을 떠올리고 몸서리를 쳐댔다. 아버지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 참여했다가 신라군에게 생포되어 참수당한 일로 인하여 부여소비는 삼맥종 왕의 씨앗을 유산(流産)한 일이 있었다. 왕이나 부여소비나 그 일로 관계가 소원해졌고 두 나라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되어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또한, 부여소비는 아버지 부여명농의 목이 신라 군부의 잔인한 조치로 신라 관서인 북청(北廳) 계단 아래 묻힌 일로 충격을 받고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결국, 부여소비는 재가불자(在家佛者)로 삼보(三寶)에 귀의해 힘든 나날을 견디고 있었다.

‘오늘은 월화궁주를 위로해야 하겠다.’

왕은 나인에게 오늘 밤은 월화궁주 처소에서 하룻밤 묵을 예정이라고 했다. 규칙대로라면 어제에 이어 오늘도 미실궁주와 합궁하는 날이었다.

“대왕께서 이리로 납시신다고?”

월화궁주는 왕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직 해가 있는데도 경대(鏡臺)를 들여다보며, 마치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들뜬 상태였다. 시녀들은 평상시와 달리 그런 월화궁주를 이상한 시선으로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월화궁주는 칠보단장을 마치고 나인들에게 최고로 맛있는 안주와 명주(名酒)를 준비하라고 명했다. 땅거미가 지자 그녀는 월화궁 앞까지 나가 지아비를 기다렸다.

“대왕님 납시오.”

내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월화궁주의 가슴을 두방망이질 치게 했다. 그녀는 내관을 앞세우고 걸어오는 지아비 삼맥종 왕을 보고 뛰어갔다.

“궁주, 안에 있지 않고요?”

왕이 월화궁주를 발견하고 달려가 큰소리로 외쳤다.

“대왕께서 순번을 바꿔서 부러 월화궁에 드시는데, 소첩이 어찌 가만히 앉아서 맞을 수 있겠사옵니까? 소첩은 대왕의 배려에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왕은 월화궁주의 공손하고 정감 어린 말에 울컥하여 잠시 할 말을 잊고 그녀의 배시시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왕비와 미실 등 신라 출신 궁비들이 현란한 모습으로 사내의 눈을 어지럽게 하는 오뉴월에 핀 기화요초(琪花瑤草)라면, 월화궁주는 달빛이 교교한 밤에 남몰래 피어나는 월화(月華)가 분명했다. 왕이 산해진미가 차려진 내실에 들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왕은 오늘 밤은 월화궁주의 이러저러한 성화에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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