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 석씨족의 골육상쟁

 과일나무 아래 입을 벌리고 앉아 있다고 입안으로 과일이 떨어지지 않는다. 바람이 불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훔쳐 갈 수 있다. 우리 가문은 먼 미래를 보고 준비를 해야 한다. 미추는 조정 안팎의 인사들을 두루 만나면서 좋은 관계를 맺어놓거라.

그리고 말구, 대서지는 중앙과 지방의 장관들 또는 군부 인사들을 잘 사귀거라. 짧으면 십 년 길면 이십 년 내로 우리 가문에 영광이 있도록 다 함께 최선을 다하자.”

그미의 눈에서 푸른빛이 발산되고 있었다.

“어미가 너희들에게 한마디 하마. 서라벌에는 눈들이 많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다. 서라벌 저잣거리에는 석씨와 박씨 가문에 충성하는 하수인들과 파락호들이 차고 넘친다.

옥모가 조금 전에 말했듯이 앞으로 너희들은 벙어리와 귀머거리 그리고 장님처럼 살아가야 한다. 너희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는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 명심하거라.”

그미의 어머니 술례부인 박씨는 이칠(伊柒) 갈문왕의 딸이었다. 조쌀해 보이는 그녀는 매사에 조심스럽고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로 자식들을 지극 정성으로 훈육하였다. 그미는 태자궁을 나와 두 아들과 친정으로 거처를 옮겼다.

지아비도 없는 궁궐에 어린 자식들과 남아있는 것이 내해이사금을 볼 때마다 무척 부담을 느껴야 했다. 내해이사금도 그미가 친정으로의 이거(移去)하는 것을 흔쾌히 승낙하였다. 서라벌의 세월은 청산유수와 같았다.

그미는 내해이사금에게 큰딸 수로를 시집보냈고 두 아들의 훈육에 정성을 쏟았다. 그미의 세 남동생은 경향(京鄕) 각지에서 은밀하게 행동하며 후일을 도모했다.

대륙의 최강자로 우뚝 선 고구려의 태왕은 동천 태왕의 아들 고연불(高然弗)이었다. 추모왕 고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280여 년이 지난 뒤라 국가의 기틀은 확고하고 공고했으며, 서방의 위(魏)나라와 자웅을 겨룰 만큼 국력이 막강하여 만방에서 조공을 바치는 나라가 줄을 설 정도였다. 태왕은 아버지를 닮아 팔척장신에 무부(武夫)의 기질을 타고난 호남이었다.

부왕의 갑작스러운 붕어에 25살 청년 연불이 졸지에 대제국 고구려의 지존이 되었다. 즉위 초기에는 선왕이 *짐독으로 독살되었다는 소문으로 인하여 태왕의 두 동생인 예물(預物)과 사구(奢句) 등이 모반하였다가 처형되기도 했다.

태왕은 연나부 출신 국상인 명림어수의 절대적인 협조로 국내 정세를 안정시키고 대외 사업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태왕은 즉위한 뒤로 백제의 호전적인 군주 고이왕(古爾王)과 자주 부딪쳐 여러 차례 국지전을 치르기도 했다. 태왕은 여성 편력이 심한 편이었다.

그는 선왕의 비(妃)이며 모후인 명림전(明臨鱣) 태후, 연나부 출신 왕비 연씨(椽氏), 요(要)공주, 관나부 출신 관나부인, 잠후(蚕后), 주후(朱后), 연감(淵甘) 등 여러 명의 비빈(妃嬪)을 두고 있었다. 어머니를 후비로 둔 것은 형사취수제에 따른 전통 때문이었다. 요즘 들어 태왕이 관나부인 처소에 드나드는 일이 빈번해지자 연 왕비와 다른 후궁들의 신경이 무척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 짐독 - 짐새에서 얻은 독을 짐독(鴆毒)이라고 하는데, 짐독은 독 중에서 가장 강력하여 고구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했다.

 “이사금, 우리 계림국이 기댈 수 있는 곳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고구려밖에 없습니다. 백제와 왜국, 말갈 등이 우리 계림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고구려와 계림국이 한번 국경에서 군사들이 심하게 부딪힌 적은 있었지만, 지금은 우리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나라의 앞날을 알 수가 없으니, 속히 고구려와 동맹을 맺어야 합니다.”

“모후, 소자는 고구려 태왕이 어떤 인물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미와 첨해(沾解)이사금이 머리를 맞대고 심각한 표정으로 국정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곁에는 그미의 둘째 딸 석정(昔精) 공주가 다소곳이 앉아서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석정은 그미보다는 다소 떨어지기는 하지만 서라벌에서 소문난 미녀였다.

계림국에서 제법 큰소리 좀 친다는 가문에서는 금은보화를 바리바리 싸 들고 석정 공주를 며느리로 들이기 위해서 그미를 찾아왔으나 그미는 코웃음만 쳤다. 그미의 깊은 속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계림국의 아홉 번째 군주인 벌휴이사금이 붕어하자 석씨 가문은 크게 둘로 갈렸다. 하나는 벌휴이사금의 큰아들 골정의 계보를 잇는 골정계(骨正系)와 벌휴이사금의 둘째 아들 이매의 혈통을 잇는 이매계(伊買系)였다.

첨해는 형 조분 이사금의 뒤를 이어 군주가 되자 요절한 아버지 골정을 세신갈문왕(世神葛文王)으로 추봉했다. 지아비가 갈문왕에 추봉되면서 그미는 계림국의 태후가 되었고, 석정은 공주가 되었다. 그미는 어느새 아들 첨해이사금을 능가하는 계림국 최고의 권력자가 된 것이었다.

첨해이사금 앞으로 항렬이 같은 두 명의 이사금이 있었다. 바로 내해와 조분이사금이었다. 계림국 열 번째 내해이사금이 붕어하고 그 뒤를 그미의 큰아들 조분(助賁)이 군주의 자리에 올랐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붕어하였다. 조분이사금의 뒤를 이어 아우 첨해가 계림국의 열두 번째 군주가 된 것이다. 내해이사금이 붕어할 때 그에게는 태자인 우로(于老)와 이음(利音)이 있었다.

우로와 이음의 생모는 바로 그미의 딸 수로부인이었다. 우로와 이음 형제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주가 되지 못한 것에 한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외할머니인 그미와 어머니 수로부인 때문에 밖으로 울분을 표출할 수 없는 처지였다. 내해이사금이 평탄한 군주 역할을 하고 임종 전에 두 아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우로야, 이음아, 아비의 유언을 잘 새겨들어라. 내가 죽거든 내 뒤를 이을 사람은 조분이다. 너희들은 군주의 자리를 탐내면 절대로 안 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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