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부 – 지상의 반도연회

태왕은 그날 저녁 그미와 석정 공주를 환영하는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에는 고구려 조정의 대소신료들은 물론 왕실 인사들도 대거 참석하였다. 태왕은 대제국의 군주로서 그미에게 위신을 세우고 싶었다.

소와 돼지 수백 마리를 잡고 이웃 나라에서 조공으로 바친 산해진미가 주연상 위에 태산같이 올려졌다. 그날은 태왕의 명령에 따라 대궐 앞마당과 궁성 밖에도 임시 천막을 치고 도성에 사는 백성들까지 불러 고기와 술을 배불리 먹도록 했다.

온 성이 떠나갈 듯 왁자했다. 오늘같이 태왕이 도성 백성들까지 불러 주연을 베푸는 일은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볼 수 있는 진풍경이었다. 백성들은 모두 저잣거리로 나와 먹고 마시며 태왕과 계림국 태후 이야기에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과연 연불 태왕은 통이 크고 대인의 풍모를 지니셨어. 우리 같은 무지렁이에게도 술과 고기를 내리시니 지금이 바로 태평성대가 아니겠는가?”

“이보게 흥부, 이게 무슨 술인지 알기나 하는 거여? 이 술은 국혼을 축하하는 술이야. 태왕께서 계림국 옥모 태후와 혼인을 하신대.”

“아니야, 놀부 자네가 잘못 알고 있네. 옥모 태후가 아니라 태후의 딸 석정 공주와 국혼을 하는 거래. 똑바로 알고 떠들라고. 모르면 술이나 마시고.”

백성들은 술을 마셔대면서 태왕을 칭찬하느라 열을 올렸다.

“예쁜 여인이라면 환장하는 태왕께서 저절로 굴러온 호박 두 개를 그냥 둘 것 같은가? 하나는 구워 먹고, 또 한 개는 호떡을 만들어 먹겠지. 지난봄에 서하에 수장(水葬)당한 관나부인만 억울하게 되었네. 지금쯤 원귀(冤鬼)가 되어 구천을 떠돌고 있을 거야.”

“이 사람아, 목이 몇 개라도 되는가? 말조심하게.”

“말똥이 말이 맞네. 우리 같은 사람은 평생 여인네 고샅 구경 한번 하기도 어려운데, 궁성에는 비빈이 넘쳐나지 않는가? 그런데 멀리 계림국에서 두 마리 암 여우가 제 발로 왔으니 태왕은 오죽이나 좋겠는가?”

술에 취한 사내들은 옆에 관리나 군사들이 있어도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모두가 취한 상태라 태왕을 험담하든 또는 칭찬하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소문을 듣고 국내성 밖에 사는 가난한 백성들도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궁성과 저잣거리는 밤새도록 불야성을 이루었다.

아낙네들도 삼삼오오 모여 술과 고기로 배를 채우며, 태왕의 후덕함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가난한 백성들은 먹다 남은 음식을 보자기에 싸가기도 하고 억지로 뱃속으로 구겨 넣기도 했다.

“쇠똥어멈, 많이 드슈. 오늘같이 태왕께서 베푸실 때 안 먹으면 평생 후회한다구. 고기가 목구멍에 찰 때까지 먹어두라구.”

“대식 어멈도 배가 터지도록 드시구랴. 태왕님 만세야.”

궁궐에서는 환락의 밤이 절정을 향하고 있었다. 연회장 한가운데에 마련된 주연상에는 태왕과 그미가 마치 부부라도 되는 것처럼 다정하게 앉고 좌우로 석정 공주와 태왕의 비빈들이 앉았다. 왕비 대신 타국의 태후를 고구려 태왕 옆에 앉히는 것은 전례가 없는 파격적인 조치였으나, 비빈들은 태왕의 의도를 짐작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미의 빼어난 미모와 아름다운 자태는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석정 공주 역시 그미에 버금갈 정도로 화려한 맵시를 자랑하였다. 태왕의 늙은 전태후와 연왕비 등 비빈들은 자신들의 추레한 모습에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였다. 백여 명의 악사가 연주하는 풍악이 울리자 속살이 훤히 드러나는 날개옷을 입은 젊은 무희(舞姬)들이 춤을 추며 연회장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이미 반쯤 취한 중신들은 무희들의 뒤태에 혼이 나가 해롱거렸다. 젊은 신료들은 무희와 시선이 마주치면 벼락을 맞은 것처럼 전율하면서 눈동자가 뒤집히기도 했다. 연회장을 오가며 시중을 드는 시녀들 역시 날개옷을 입은 터라 엉큼한 신하들은 시녀들의 엉덩이를 슬쩍 만져보기도 했다.

시녀들은 마음에 드는 사내면 눈을 찡긋하며 미소를 지었고, 사내는 얼른 은자(銀子)를 시녀 앞가슴 사이에 넣어주기도 했다. 마음에 없는 사내가 건드리면 시녀는 눈을 흘기며 무서운 얼굴로 노려보았다.

태왕이 앉은 뒤로 화려한 병풍이 펼쳐져 있는데 보기만 해도 병풍에 그려진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림은 곤륜산 요지에서 아름다운 서왕모와 주목공이 연회를 즐기는 장면이 분홍색 비단 위에 오색 실로 수 놓여 있었다.

그들 주변에는 삼천 년에 한 번 열리는 반도(蟠桃)와 청송, 괴석, 기린, 공작, 사슴, 학 등이 그려져 있었다. 서왕모와 주목공은 궁녀와 시종을 거느리고 주연상에 앉아 봉황과 선녀들의 춤을 감상하며 여흥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무척 황홀해 보였다.

“태후, 짐과 춤 한번 춰보지 않겠습니까?”

어느 정도 취기가 올라 기분이 좋아진 태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미는 민망하여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았다. 석정 공주가 그미와 시선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었다. 석정 공주의 하얀 미소속에는 지아비가 될 태왕에 대한 연민과 그미에 대한 게염이 진하게 녹아있었다.

“폐하, 비빈들과 중신들 눈이 있습니다.”

“태후, 짐은 고구려의 주인입니다. 짐의 말이 곧 법이고, 만백성은 짐의 말을 따라야 합니다. 비빈들 역시 짐의 백성들입니다. 짐이 흥겨워 태후와 춤을 추고자 하는데 어느 누가 감히 뭐라 하겠습니까?”

태왕이 춤을 추고 싶어 하는 의지가 너무나 확고하여 그미는 못 이기는 척 태왕의 손을 잡고 무대 한가운데로 나갔다. 태왕의 모후이면서 동시에 후비(后妃)인 전(鱣)태후와 연(椽) 왕비를 비롯한 태왕의 비빈들은 충격을 받았다. 이제껏 태왕이 공식적인 연회장에서 비빈의 손을 잡고 무대로 나가 춤을 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연회장에 앉아 있던 수많은 대소신료는 비빈들의 눈치를 보며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몰라 더펄이처럼 갈팡질팡했다. 태왕과 그미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무대에 오르자 일순간 연회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태왕이 악공들을 향해 수신호를 보내자 풍악이 울렸다.

“폐하, 소신을 이리 환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그미가 춤을 추면서 태왕의 귀에 대고 속살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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