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부 – 모녀가 한 지아비를 모시다

“짐은 세상에 태어나 오늘처럼 행복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어디 있다가 이제야 짐 앞에 나타나셨습니까? 태후를 처음 본 순간 짐은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숨을 쉴 수도 없었습니다. 평생을 꿈속에서 그리워하던 몽인(夢人)을 이제야 만났습니다. 태후는 이제부터 짐의 허락 없이는 움직이면 안 됩니다.”

태왕이 두 팔을 높이 들고 그미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미도 태왕의 춤사위에 맞춰 온갖 교태(嬌態)를 부려가며 태왕의 혼을 뺐다. 악사들 옆에 서 있던 무희들이 나와 태왕과 그미를 빙 둘러싸고 춤을 추었다. 나이가 든 중신들은 환상적인 모습에 두 눈을 비비며 무대에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곧이어 젊은 신료들은 손뼉을 쳐대며 ‘폐하 만세’, ‘옥모 태후 천세’를 외쳤다.

‘아,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구나. 나는 계림국의 태후로서 석정 공주를 태왕에게 시집보내려고 왔거늘, 태왕은 자꾸만 이상한 말만 하는구나.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석정 공주가 태왕의 속내를 알면 크게 실망할 텐데.’

연회장은 순식간에 태왕과 그미 그리고 무희들이 발산하는 열기에 휩싸여 흥분의 도가니가 되고 말았다. 석정 공주도 박수를 쳐대며 모후와 태왕의 아름다운 만남을 축하했다. 그러나 전태후와 연 왕비를 비롯한 비빈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빈 술잔만 만지작거리며 깊은 생각에 빠진 듯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붕어한 조분이사금에게는 후궁의 소생인 아들 걸숙(乞淑)과 유례(儒禮)가 있었고, 왕비 사이에는 명원공주와 광명공주만 있었다. 첨해이사금 재위 기간에는 조분이사금의 가족들은 숨을 죽이고 살아가야 했다. 첨해이사금에게 최대의 정적은 내해이사금 아들 각간 석우로(昔于老)였다.

그는 조분이사금 때 대장군으로 승차하여 *감문국을 정벌했고, 계림국을 침범한 왜군을 격퇴하였다. 곧이어 각간이 되어 계림국의 병권(兵權)을 장악했다. 조분이사금 말년에는 고구려의 침공을 막아내기도 했고, 백제와 가까이 지내고 있던 *사량벌국을 정벌했다.

 * 감문국 – 감문국(甘文國)은 경상도 김천 지역에 있던 소국(小國).
* 사량벌국 – 사량벌국(沙梁伐國)은 경상도 상주 지역에 있던 소국.

 박혁거세 이후 아우가 군주의 직분을 이은 경우는 첨해이사금이 처음이었다. 계림국에서는 군주에게 아들이 없고 딸만 있으면 사위가 다음 군주를 잇는 것이 전통이었다. 조분이사금의 장녀인 명원공주의 배우자가 석우로이니 마땅히 그가 군주의 자리에 앉아야 했다.

석우로는 군주 자리를 찬탈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군주가 되지 못한 원인을 그미의 간섭 때문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로는 감히 그미를 탓하거나 비방할 수 없었다.

조정 내에 특별한 지지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군주가 된 첨해이사금은 늘 좌불안석이었다. 조정 신료들뿐만 아니라 백성들조차 첨해이사금보다 석우로를 더 존경하고 따르는 분위기였다. 첨해이사금은 밤잠까지 설칠 정도로 석우로에 대한 질투와 시기가 극에 달했다.

계림국은 늘 왜 열도에 있는 야마타이국(邪馬台国) 침범에 시달려왔다. 요즘 들어 다행히 왜와 계림국 사이가 우호적인 분위기로 바뀌고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데서 외교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왜국에서 계림국에 사신이 왔는데 석우로가 사신을 대접하는 자리에서 술김에 ‘너희 왜국의 왕을 잡아다 소금 굽는 노비로 삼고, 왕비는 밥 짓는 노비로 삼겠다.’라는 말을 하였다. 왜국 사신이 돌아가 왜왕에게 고하자 왜왕은 대노하여 장수 우도주군(于道朱君)과 군사를 보내 계림국을 침범하게 했다. 이에 놀란 첨해이사금은 *우유촌(于柚村)으로 급히 몸을 피했다.

‘지금 이 환난은 내가 말을 조심하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다. 내가 왜장을 만나 해결하겠다.’

일이 커지자 석우로는 단신으로 왜군의 진영으로 찾아갔으나 곧 체포되고 말았다. 그가 왜장을 만나 오해를 풀려고 했지만, 우도주군은 석우로의 말을 듣지도 않고 그를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불을 질러버렸다. 계림국의 왕족이면서 병권을 쥐고 있던 장군이 농담 한마디 했다가 왜군에게 화형(火刑)을 당하고 만 것이다.

“왜놈들이 쳐들어와 석우로를 불태워 죽였는데도, 첨해는 도망 다니기 급급했다. 그놈들은 자기네 왕을 욕했다고 군사를 몰고 쳐들어와 석장군을 죽였는데도 첨해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무슨 흑막이 있다.”

 * 우유촌 – 우유촌(于柚村)은 경상도 울진 지역으로 비정되고 있음.

 석씨 가문과 백성들은 첨해이사금이 왜군을 끌어들여 우로를 고의로 죽게 했다며 맹비난하였다. 첨해이사금이 우로에게 적대감이 없었다면 군대를 동원하여 왜국을 정벌하거나 보복전을 전개해야 마땅했다. 첨해이사금은 점차 고립되어가고 있었고, 여기에 조분이사금의 둘째 사위인 김미추(金味鄒)도 가세하였다.

이 사건으로 계림국의 귀족들은 석우로의 죽음을 두둔하는 파와 첨해의 입장을 지지하는 파로 갈리게 되었다. 문제는 서라벌의 최대 족벌 세력으로 성장한 김씨들 마음의 향배에 따라 권력의 이동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왕비, 이 아이 좀 보시구려. 근골(筋骨)이 단단하고 신체도 다른 왕자들 어릴 때보다 훨씬 크며, 완력도 무척 강한 것 같습니다. 장차 고구려에서 크게 쓰일 인물이 될 게 분명합니다.”

“폐하의 정기가 모두 달가(達賈) 왕자에게 이어진 듯 합니다. 소첩이 폐하를 만난 지가 벌써 십 년이 되었습니다. 강산이 한번 바뀌는 동안 소첩은 폐하에게 받기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늘 송구한 마음이랍니다.”

“아닙니다. 받은 쪽은 왕비가 아니라 짐이지요. 지난 십 년을 가만히 회억해보면 꿈만 같습니다. 왕비는 짐이 알고 있는 여인 중 최고입니다. 마음씨뿐만 아니라 궁합도 왕비가 제일 잘 맞습니다. 또한, 왕비로부터 딸 석정 공주를 받았고, 공주가 짐의 후비가 되어 봉(鳳) 왕자를 안겨주었습니다. 왕비께서는 이 아이뿐만 아니라 운(雲) 공주도 선물하지 않았습니까? 그 정도면 짐에게는 과분한 정성입니다.”

그미는 태왕과 국내성에서 삼백여 리 떨어진 졸본에 잠시 머물고 있었다. 태왕이 사냥을 좋아하는지라 휴식이 필요하면 태왕은 늘 그미를 대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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