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부 – 왕비족에서 군주를 세우다

‘이 늙은이가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감히 짐을 훈계하려 드는구나. 모후의 간청만 없었더라면 당장 참수형에 처하련만. 좋다. 이번에는 짐이 한 발짝 물러서겠다.’

태왕은 기분이 상했지만 계속해서 고집을 부릴 수도 없었고, 전태후와 국상의 말이 틀린 게 아니었다. 태왕은 입을 꾹 다물고 비빈들과 중신들을 바라보며 ‘킁킁’거리다 비답을 내렸다.

“아, 알겠습니다. 태후와 국상께서 그렇게까지 나라를 위하는 줄 미처 몰랐습니다. 짐이 서신을 써서 옥모 왕후의 초청을 반려하지요.”

“폐하, 성은이 하해와 같습니다.”

그미를 만난다는 기쁨도 잠시였다. 태왕은 지밀전에 들어 두문불출하며 술로 사나흘 보내다가 그미에게 보내는 답신을 적었다.

옥모 왕비, 보세요.

짐의 나라가 지난 폭우로 40여 곳의 산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또한,며칠 전에는 천문관(天文觀)이 살별이 동쪽으로 길게 꼬리를 뻗쳐서 짐의 나라에 재앙이 있을 수 있음을 고했습니다.

짐이 그대를 사모하는 그리움이 쌓여 태산보다 높아 하늘에 닿을 듯 합니다. 그대가 강을 건너시겠다면 오작교를 놓아드릴 것이니, 원하건대 어서 오시어 *무산(巫山)에 들어가 못다 한 운우를 함께합시다.

 그미는 출산한 몸을 추스르고 운(雲) 공주와 함께 고구려로 갈 예정이었다. 계림국을 떠나 고구려로 향할 생각을 하니, 계림국의 정정(政情)이 걱정되었다.

반년 전 그미가 해산을 위해 서라벌을 찾았을 때 첨해이사금이 거의 폐인이 되어 있었다. 그는 거의 매일 요분질에 이골이 난 궁녀들 치마폭에 싸여 술로 밤낮을 지새우고 있었다.

그미가 첨해이사금을 찾아가 아무리 어르고 타일러도 그는 ‘알았다’고 만 할 뿐 아무 소용없었다. 그미가 어의(御醫)를 불러 알아본 결과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첨해이사금은 후궁들과의 과도한 방사(房事)와 폭음으로 기(氣)를 모두 소진하여 예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고 했다.

 * 무산 – 무산(巫山)은 초나라 회왕(懷王)이 꿈속에서 염제의 딸 요희와 사랑을 나눈 산을 말한다,

요희는 낮에는 구름으로 있다가 밤이면 비가 되어 내리는데, 이를 운우라 한다.

그미는 자신이 고구려의 왕후가 되어 옥의옥식하는 동안에 계림국의 정치판이 이상하게 변질되어 있음을 알았다. 이미 첨해이사금의 입지가 매우 위험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미는 운 공주를 출산하고도 계림국에 서너 달 더 남아있으려고 했지만, 자신이 고구려 왕비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었다.

그미가 태왕 곁에 없는 동안 다른 비빈들이 태왕에게 자신에 관하여 어떤 험담(險談)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미는 서라벌을 떠나기 전에 친정 남동생과 큰딸 수로부인을 불렀다.

“계림국의 태후이시며, 고구려의 왕비이신 어머님을 뵙습니다.”

그미의 큰딸 수로부인(水老夫人)은 그미에게 절을 하였다. 수로부인은 붕어한 내해이사금의 비(妃)였으며, 슬하에 석우로, 석이음 형제와 아이혜(阿爾兮) 공주를 두었다. 그미는 오랜만에 만난 딸이 반갑기도 했지만 한편 미안하기도 했다.

그미도 수로부인의 큰아들 우로가 첨해이사금의 음모에 의해 왜국 장수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믿고 있었다. 아들 우로가 비참하게 죽고 난 뒤로 수로부인은 친정과 교류를 끊고 지내다시피 했다.

“수로야, 어미가 미안하구나. 내가 계림국에 상주했더라면 그러한 불상사가 없었을 텐데 말이다. 너를 볼 면목이 없구나.”

“어머니, 이미 지난 일인걸요.”

“대고구려 왕비이시며, 계림국 태후이신 옥모 누님을 뵙습니다.”

그미의 바로 아래 남동생 미추가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남매지간이지만 그미는 태후이며, 왕비의 신분이었다.

“태후님이시며, 왕비님이신 누님을 뵙습니다.”

“대고구려의 왕비님을 뵙습니다.”

그미의 둘째 남동생 말구(末仇)와 막내 남동생 대서지(大西知)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그미를 보고 웃었다. 미추는 서라벌에서 자신의 세력을 결집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말구와 대서지도 서라벌과 지방 여러 곳을 오가며 김씨 지지층을 모으느라 정성을 쏟는 중이었다. 미추는 조분이사금의 딸 광명부인을 배우자로 두고 있었다.

특히, 미추는 왕비족이라는 가문의 배경을 십분 활용하여 서라벌 백성들의 각종 억울한 일들을 앞장서서 해결해주면서 큰 인물로 성장하였다. 김씨 문중에서도 그의 위치는 확고부동하여 누구도 감히 그에게 시비를 걸거나 헛소리를 하지 못했다. 그가 큰 인물로 주목받은 데에는 그미의 위상이 한몫을 단단히 했다.

“첨해는 내 뱃속에서 나온 자식이지만 나는 그 애를 포기했다. 애초 내가 그 애를 군주의 자리에 세우는 게 아니었다. 외손자인 우로를 계림국 군주로 옹립했으면 나라가 이 지경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첨해의 건강이 극도로 좋지 않다. 해서, 첨해가 갑자기 변고를 당했을 때를 대비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현재 붕어한 조분이사금의 아들 유례(儒禮)가 가장 유력한 차기 군주 후보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 아이는 나의 손자이며 조분이사금의 서자이지만 성격도 괴팍스러워 꺼림칙하다. 나는 여러 날 생각한 끝에 결단을 내렸다. 첨해가 변고를 당하면 미추가 차기 군주의 자리를 잇도록 해라.”

“어머니, 어떻게 저희와 한마디 상의도 안 하시고?”

수로부인의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변했다. 그렇지만 권력자로 변신한 생모의 말에 달리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었다. 계림국에서 그미의 말이 곧 법이나 마찬가지였다.

“누님, 저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습니다.”

미추가 그미와 수로부인의 눈치를 보았다. 말구와 대서지도 머리를 벅벅 긁으며, 그미와 수로부인의 반응을 살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다섯 사람의 어깨를 짓눌렀다. 내실에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딸과 동생들의 반응이 신통치 않자 그미는 정색하고 딸과 동생들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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