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부 – 왕궁에 드리우는 반란의 암운
“지금부터 계림국의 태후이며, 고구려 왕비로서 너희들에게 명한다. 너희들이 합심하여 미추를 군주로 세워라. 차기 계림국 군주는 반드시 김씨 집안에서 나와야 한다. 나는 태왕에게 나의 뜻을 전하고 지지해 달라고 할 것이다. 태왕은 나의 청을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첨해는 얼마 살지 못한다. 그 아이가 죽으면 곧바로 고구려의 수만 군사들이 국경에 대기하고 있을 것이며, 일부 장군들과 군관들이 정예병을 이끌고 서라벌로 들어올 것이다.”
그미의 명령에 수로부인과 그미의 동생들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미는 이미 계림국 뿐만 아니라 고구려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자였다. 그녀의 보이지 않는 휘광(輝光)은 밤하늘에 높이 떠 있는 보름달보다 더 찬란했으며, 아름다운 외모에서 발산하는 위엄은 계림국 군주보다 훨씬 위에 있었다.
자신의 의중을 분명히 전달한 그미는 오랜만에 만난 큰딸과 남동생들을 위하여 주안상을 준비했다. 그미의 형제들은 십여 년 전 아버지 구도(仇道)가 유명을 달리할 때 그미가 했던 말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나이에 비해 조쌀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미욱해 보이는 수로부인만 아직도 그미의 의도를 확실히 파악하지 못해 잡념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었다.
첨해이사금은 피폐해진 육신으로 내외 우환에 시달리면서도 날마다 황음(荒淫)에 빠져 국사를 소홀히 했다. 중신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고 박씨 집단과 김씨 집단 그리고 석씨 집단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일촉즉발의 양상을 보였다. 그미가 고구려로 떠나자 서라벌의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지하에 숨어있던 잠룡(潛龍)들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면서 서라벌은 권력 투쟁의 휘오리에 휩싸였다.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어느 날 밤. 정체불명의 무리가 *월성(月城) 동쪽 담장을 넘었다. 병장기를 손에 든 괴한들은 연지(蓮池) 주변에서 잠복해 있다가 대궐 수비 군사들에게 발각되어 일대 접전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관군 수십 명이 목숨을 잃고 첨해이사금은 초저녁부터 궁녀들과 어울려 주연을 즐기다가 허둥지둥 몸을 숨겨야 했다. 괴한들의 정체와 궁궐 담장을 넘은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첨해이사금에게 불만을 품은 자들이 분명했다. 고빗사위를 간신히 넘긴 첨해이사금은 더욱 움츠러들어 국정은 거의 마비되다시피 했다.
* 월성 – 박혁거세부터 사로국의 궁성은 금성(金城)이었으나, 파사 이사금 때 월성을 새로 지어 정궁으로 삼았다. 후대에는 궁성의 형태가 반달 같다 하여 반월성이라고도 불렀다.
정월부터 시작된 가뭄이 계속되는 바람에 농작물은 자라지 못했고,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한 백성들이 도둑 떼로 변해 전국의 인심이 흉흉했다. 전국적으로 메뚜기떼가 그나마 남아있던 농작물을 모두 갉아먹는 바람에 민심은 최악의 상태였다. 또한, 여태껏 가물다가 갑작스럽게 폭우가 내리면서 수백여 마을이 물에 잠기고 산사태로 민가가 매몰되어 백성들이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이 같은 일련의 사태로 첨해이사금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그 와중에 백제군이 국경을 넘어 백성들을 도륙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일길찬 *익종(翌宗)이 백제군과 싸우다 전사하고 수많은 군사가 죽임을 당했다. 계림군은 백제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려 *봉산성(峰山城)까지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계림국 군사들의 사기는 이미 땅에 떨어져 눈앞에 적군이 활보하여도 성문을 굳게 닫고 응대하지 않았다. 첨해이사금은 고육지책으로 백제와의 전쟁을 막기 위하여 백제에 친선사절단을 보냈지만, 고이왕(古爾王)은 계림국 사신들을 접견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옥모태후가 떠나니 나라 꼴이 말이 아니네그려.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망하게 생겼어. 빨리 이사금을 갈아치워야 해.”
“뺑덕어멈 말이 맞아. 첨해는 원래 이사금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자였다네. 석우로 장군이 군주가 돼야 했어. 그리되었더라면 우리 계림국 백성들이 지금처럼 고통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야.”
“첨해가 왜놈들과 내통하여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석우로 장군을 죽이고도 잘 될 거로 생각했다면 그건 큰 착각일 거야. 천지신명이 노한 거야. 나라의 큰 인물을 함정에 빠트려 죽였으니 나라가 잘될 리가 있나?”
“내 조카가 궁궐 문지기로 있는데, 첨해가 매일 술에 절어 여우 같은 궁녀들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대요. 몸에 병이 들어 거동도 잘 못 하는 상태에서도 항상 취해있으니 조만간 국상(國喪)이 일어날 거래.”
“지금 서라벌에서는 미추공과 조분이사금 장남이신 유례공(儒禮公) 그리고 박씨 가문의 이무기들이 차기 이사금 자리를 노리고 암투를 벌이고 있대요. 첨해가 죽으면 서라벌은 한바탕 피바람이 불게 생겼어.”
“어젯밤에도 살별이 나타나고 밤새 유성우(流星雨)가 쏟아졌대. 아무래도 나라에 불상사가 일어날 조짐이 분명해. 시국이 어떻게 변할지 난 너무 무서워 죽겠어.”
* 익종 - 첨해이사금 때의 이벌찬(伊伐飡)으로 석씨(昔氏)로 추정되고 있다.
* 봉산성 – 경상도 영주 지역에 있던 산성.
빨래터에 모인 아낙들은 빨래할 생각은 하지 않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들이 하는 이야기에는 요즘 서라벌 정세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었다. 아낙들의 걱정과는 반대로 한동안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폭풍 전야처럼 정국은 고요했고 가난한 백성들은 일상처럼 첨해이사금을 원망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