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부 – 첨해이사금 비명에 가다

첨해이사금이 계림국의 군주가 된 지 14년이 되는 섣달 28일 새벽이었다. 지난 밤 고주망태가 되도록 대취한 첨해이사금은 후궁과 영명궁(永明宮)에 잠들어 있었다. 한 무리의 복면을 쓴 괴한들이 다시 월성 동쪽 담장을 넘었다. 그들의 손에는 활과 칼이 들려 있었다.

“지금 *묘시(卯時)가 좀 지난 시각이다. 이번 거사는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첨해만 죽이면 우리 임무는 끝난다. 지난번처럼 실패하면 우린 죽은 목숨이다. 만약 관군에게 잡히면 극약을 먹고 자살하라. 우리 편 나인들에 의하면 저기 보이는 전각이 첨해와 그의 후궁이 잠들어 있는 영명궁이 틀림없다. 밖에 궁녀와 수식(守直)을 보는 군사들이 있을 것이다. 반항하면 가차 없이 죽이고 내실로 들어가자.”

무리를 이끄는 대장처럼 보이는 자가 괴한들에게 행동 방향을 일러주었다.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워 옆에 있는 사람조차 구분하기 힘들었다. 그들이 어둠을 뚫고 영명궁 앞에 접근했을 때였다.

 * 묘시 – 새벽 5시부터 7시 사이

“누구냐?”

“앗, 들켰다. 저놈들부터 죽여라.”

괴한의 대장이 소리치자, 괴한들이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쉭-’하는 소리와 함께 무리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던 수직 군사들이 땅바닥에 나가떨어졌다. 곧이어 칼을 빼든 괴한들 이십여 명이 영명궁 안으로 난입하였다.

그들은 앞을 가로막는 나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첨해이사금이 잠들어 있는 지밀전 안으로 뛰어들었다. 은은한 촛불이 켜진 지밀전에는 첨해이사금이 후궁의 알몸을 부둥켜안고 잠에 취해있었다. 희미한 불빛에 후궁의 흐벅진 육덕이 눈부시게 빛났다. 괴한들은 마른 침을 삼키다가 첨해이사금을 발로 툭툭 걷어차며 소리쳤다.

“첨해야, 이제 저승으로 갈 때가 되었다. 밤새 암 여우와 질펀하게 요분질을 한 모양이구나. 너의 세상도 이제 끝났다. 어서 일어나거라.”

괴한의 대장이 장도를 뽑아 들고 소리쳤다. 그 바람에 후궁이 놀라 일어났다.

“이놈들, 너희들은 누군데 감히 이사금께서 주무시는 지밀전까지 난입하였느냐? 어서 썩 물러가지 못할까?”

후궁이 투실 해 보이는 젖가슴을 드러내놓은 채 소리쳤다. 흐트러진 머리가 밤새 무슨 일을 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괴한들이 칼을 들고 서 있는데도 후궁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표독스러운 얼굴로 괴한들에게 대들었다. 괴한의 대장인 자가 후궁을 한번 노려보다가 칼을 내리쳤다. 후궁의 선혈이 비단 금침에 낭자했지만, 그때까지도 첨해이사금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잠꼬대를 해대고 있었다.

“왜 이리 시끄러운 게냐? 목이 마르다. 술, 술을 가져오너라.”

괴한들은 그의 행동에 실소를 머금고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형편없는 자가 한 나라의 군주였다니.”

“참으로 백성들만 불쌍하구나. 어차피 너는 군주가 될 자격이 없었다.”

“대장, 곧 날이 밝습니다. 어서 일을 마무리하시지요?”

괴한 한 명이 대장에게 재촉했다.

“너의 취생몽사로 인하여 그동안 계림국 백성들이 흘린 피눈물이 얼마인지 아느냐? 취한 상태에서 염라대왕을 만나보는 일도 재미있을 것이다.”

괴한의 대장인 자가 다시 한번 칼을 내리쳤다. 괴한들이 바람처럼 사라지고 한참 후에 궁궐을 수비하는 군사들이 영명궁으로 몰려들었다. 나라가 건국되고 처음으로 군주가 궁궐 내에서 피살되는 괴변이 발생했다. 월궁은 발칵 뒤집혔고, 대소신료들도 급히 등청하라는 통보를 받고 허둥지둥 궁궐로 달려갔다. 그들은 아직도 첨해이사금이 변고를 당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최근 들어 워낙 기이한 일이 자주 발생하다 보니 웬만한 일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사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궁인들이 모두 고개를 푹 숙이고 다니고 있으니 말일세.”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 백제놈들이 또 국경을 넘었거나 왜놈들이 쳐들어온 게지. 그렇지 않고서야 새벽부터 난리를 칠 일이 없지 않은가?”

“아무래도 이사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해. 요즘 들어 박씨, 석씨, 김씨들이 서로 이를 갈며 으르렁대더니 기어이 일이 터진 거야.”

대전으로 몰려든 신료들은 별의별 추측을 해가며 입방아를 쪄댔다. 두 시진이 지나서 각간이 비통한 모습으로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대전에서 조회(朝會)나 어전회의를 열 때면 보통은 이사금과 각간이 나란히 들곤 했다.

각간이 비통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권좌 옆에 서서 아무 말도 없자 대전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대전에는 첨해이사금의 친인척뿐만 아니라 박, 석, 김씨족의 대표들도 참석해 있었다. 계림국의 권력을 분산하여 쥐고 있는 세 성씨의 대표들은 웬만한 중신보다 발언권이 세었다.

“여러분께 급보를 알려드립니다. 간밤에 이사금께서 오랫동안 앓아온 지병으로 붕어하셨습니다. 당분간은 이 사람이 고위 중신과 박, 석, 김씨 문중의 대표들로 구성된 귀족 회의 의장이 되어 비상시국을 이끌도록 하겠습니다. 늦어도 한 달 내로 차기 군주를 선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계림국의 차기 군주를 선정하기 위한 절차를 속히 진행해 국정에 마비가 없도록 진력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사람을 믿고 각자의 위치에서 본분에 온 힘을 다해주시기 바랍니다.”

장훤(長萱)은 이전의 각간이었던 석우로가 죽고 난 뒤부터 각간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그는 계림국 조정 내에서 그미의 최측근 인사이기도 했다. 그는 조정의 중신 중에서 첨해이사금이 처참하게 시해당한 현장을 제일 먼저 목격한 사람이었다. 그는 중신들에게 자신이 목격한 대로 첨해이사금이 시해된 상황을 말하면 계림국은 자칫 내전으로 번질 수도 있다고 판단하였다.

장훤은 수하들을 시켜 비밀리에 첨해이사금의 시신을 깨끗하게 처리하고 관에 안치한 다음 살해된 후궁의 시신을 궁 밖으로 빼내 아무도 모르게 묻어 버렸다. 관에 안치된 첨해이사금의 시신은 잠자는 사람처럼 말끔한 상태였다. 중신들은 감히 이사금의 시신에 손을 대거나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첨해이사금이 지난해부터 몸이 마르고 가끔 각혈까지 하던 터라 아무도 그의 죽음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 아이가 결국에는 세상을 버렸구나.”

장훤은 고구려 국내성으로 사신을 급파하여 첨해이사금의 붕어를 알렸다. 그미는 고구려로 돌아온 뒤로도 태왕과 늘 함께하면서 고구려 국정을 좌지우지하였고, 태왕의 비빈들은 감히 그미를 투기하거나 시기하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미는 계림국 사신의 예방을 받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드디어 우리 김씨의 세상이 왔구나. 무슨 일이 있어도 미추(味鄒)를 차기 계림국의 군주로 옹립하도록 내가 배후에서 힘을 써야 한다. 지금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면 우리 김씨 가문은 영원히 박씨나 석씨들에게 억눌려 살면서 *색공(色供)이나 바치며 왕비족에 만족해야 한다. 내가 비록 여인의 몸이지만 우리 김씨 문중과 원통하게 돌아가신 아버님의 한을 풀어드려야 한다.’

그미는 생각을 정리하고 태왕을 찾았다.

“그래요? 계림국의 첨해이사금은 왕비의 아들 아닙니까? 왕비의 아들이면 짐의 아들도 되니, 아비인 짐이 신경을 써야겠습니다. 첨해가 여러 해 전부터 병을 앓아왔다 들었습니다. 결국, 몸이 잔약하여 이승을 등졌으니, 속히 후임자를 정해야겠습니다. 하지만 계림국에는 군주가 붕어하면 귀족 회의에서 의논하여 차기 군주를 뽑는다 들었습니다. 첨해에게 후사를 이을 아들이 있던가요?”

 * 색공 -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색(色)을 바치는 일

태왕은 계림국의 사태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지금까지 계림국은 고구려의 신하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첨해이사금이 붕어하면서 두 나라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까 태왕은 우려하였다. 만일 계림국의 군주가 없는 틈을 타서 백제나 왜(倭)가 영향력을 발휘하여 계림국을 어찌해 볼 요량이라면 고구려와의 충돌은 불가피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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