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부 – 김알지의 후손이 계림국 군주가 되다

“폐하, 첨해에게는 후사가 없습니다. 소첩에게는 조분과 첨해, 두 아들이 있습니다. 조분은 첨해 이전 계림국의 군주를 지냈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걸숙(乞淑)과 유례(儒禮)라는 아들이 있습니다만, 모두 하찮은 후궁의 소생이고 어려서 할 수 없이 첨해가 군주를 이었습니다.

지금은 그 두 손자가 장성하였습니다. 하오나 아직도 영민하지 못하고, 백성들의 신망을 얻지 못하여 나라를 책임질만한 그릇이 못 되옵니다.”

“왕비는 누가 차기 계림국의 군주가 되면 좋겠습니까?”

그미의 눈에서 파란 불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제 계림국의 차기 군주 선정은 그미의 입에 달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미는 태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현재 계림국에서 가장 쓸만한 인재는 소첩의 아우 김미추밖에 없사옵니다. 미추가 소첩의 아우라 폐하께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미추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이 뛰어나고 만백성을 아우를 만큼 빼어난 군주의 자질을 갖추고 있습니다.

계림국은 박씨와 석씨가 번갈아 가며 군주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러나 그 두 씨족은 백성들의 형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급급했습니다. 소첩의 두 아들도 석씨인데 오죽하면 이런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이에 반해 소첩의 가문은 수백 년 동안 계림국의 국모(國母)를 배출하며 군주를 보좌하고 지지하면서 지금까지 조용히 내려오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소첩을 은애하신다면 다음번 계림국 군주는 소첩의 아우가 맡도록 배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계림국 군주는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소첩이 고구려와 인연을 맺은 후 계림국과 고구려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고구려가 장차 중원대륙으로 더욱 뻗어 나가기 위해서는 후방의 안정이 필수적입니다. 만약, 백제나 왜국이 고구려의 후미를 공략하려 든다면 계림국이 나서서 그 두 나라를 저지해야 합니다. 소첩의 충심을 깊이 헤아려 주세요.”

그미의 주청에 태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태왕은 대륙의 강자인 만큼 위나라는 물론 백제, 가야, 왜까지 세작(細作)들을 들여보내 각국의 정세를 자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태왕은 그미를 왕비로 맞이하기 전부터 첨해이사금의 통치 성향과 계림국의 정치세력들에 대하여도 세밀히 알고 있었다. 방금 그미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고,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음-, 왕비의 말대로 김미추를 계림국의 군주로 세우는 방안이 가장 좋다. 유례는 죽은 조분이사금과 후궁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백성들의 신망을 얻지 못하고 있다. 걸숙도 후궁소생이지만 유례에 비하면 모든 면에서 뒤떨어진다.

또한, 죽은 아달라(阿達羅)가 계림국 박씨 가문의 마지막 군주였으나, 공식적으로는 아들이 없어 안심은 된다. 하지만, 아직도 박혁거세 후손들이 석씨에게 군주 자리를 빼앗긴 것에 대한 불만이 팽배하다.

그런데 이 와중에 김씨 가문의 미추를 군주로 앉히게 되면 계림국의 정치적 내분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될 수도 있다. 좋다. 미추를 계림국의 새로운 군주로 앉혀보자. 모두 한솥에 집어넣고 그 안에서 살아남는 놈은 살고, 잡아 먹히는 놈은 도태되는 것이다.

지난 삼백 년 넘게 계림국은 박씨와 석씨가 번갈아 군주를 맡았지만, 정치적 발전은 크게 없었다. 새로운 씨족에게 군주를 맡겨 볼 필요도 있다. 처남 미추의 역량도 시험해 볼 겸 그를 새 군주로 앉히자.’

그미는 태왕이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태왕의 발 앞에 납작 엎드려 숨을 죽이고 있었다. 태왕의 뜻이 곧 법이며, 세상의 이치와도 같았다. 그것은 신하국으로 간주되고 있는 계림국에도 적용되었다.

“왕비, 일어나세요. 왕비의 친동생이며 짐의 처남인 미추가 계림국의 군주 후보에 오른 자들 중에서 가장 명민하고 조정 신료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짐이 계림국에 특사를 파견하여 미추를 계림국의 군주로 봉하는 성지(聖旨)를 보낼 것입니다.”

“폐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소첩과 소첩의 가문은 영원히 폐하의 성은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미는 일어나 태왕에게 수도 없이 절을 올렸다. 그미의 두 눈에서는 연신 환희의 눈물이 흘러내렸고, 울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간신히 감정을 추슬렀다. 태왕은 고구려 중신이며 심복인 명림어윤(明臨於潤)을 서라벌로 보냈다. 그의 손에는 고구려 태왕이 내리는 성지가 들려 있었다.

또한, 계림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군대를 국경으로 이동시켰다. 태왕의 성지를 받든 명림어윤은 삼천여 명에 달하는 철갑기병대의 호위를 받으며 서라벌에 도착하였다. 그는 서라벌 외곽에 임시 병영을 설치하고 병력을 주둔시켰다. 계림국 조정 중신들은 고구려 태왕의 군사적 조치의 의미를 파악하느라 분주했다.

명림어윤은 계림국의 귀족들과 왕실 인사들을 만나서 먼저 차기 군주 후보에 오르내리는 인물들에 대하여 일일이 알아보았다. 고구려의 태왕이 성지를 내려 특정 후보자를 차기 계림국 후보로 내정한다고 해도 우선 계림국 내부 사정을 알아봐야 했다. 그가 여러 인사를 접촉해본 결과 김미추가 단연 최고의 점수를 받고 있었다. 그는 각간 장훤이 정한 한 달의 마지막 전날에 태왕의 성지를 공포하기로 하고 계림국 조정과 왕실 인사들에게 통보했다.

계림국 귀족 회의에 참석하는 중신들과 박, 석, 김씨들은 차기 군주 후보를 선정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석씨 가문의 원로들은 유례와 걸숙을 두고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박씨 가문에서는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 없자 일성이사금이 왜국에 망명가 있을 때 낳은 *단마제조(但馬諸助)의 후손을 불러들여 후보로 세우려 했다. 김씨 가문에서는 김미추를 군주 후보로 내정해 놓고 서라벌의 조정 중신과 지방장관들을 포섭하고 있었다.

각간 장훤이 차기 군주를 한 달 안으로 뽑겠다고 못 박은 기간이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었다. 귀족 회의에서 후보에 오른 인물 중에서 한 명을 뽑는데 선정 절차가 무척 까다로웠다. 미추와 유례가 중신들과 귀족들 사이에서 차기 군주로 오르내렸지만 아직까지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세는 이미 김미추에게 기울고 있었다. 서라벌 귀족들은 김미추의 친누이며 신라의 태후인 동시에 고구려 태왕의 왕비인 그미를 염두에 둬야 했다. 또한, 고구려 대군이 국경에 대기하고 있고, 삼천여 명의 막강한 철기(鐵騎)와 태왕의 특사가 서라벌에 와 있는 상태에서 귀족들은 미추 말고 다른 후보를 지지할 수 없었다.

* 단마제조 – 일성이사금이 왜국에 망명가 있는 타지마국(但馬國) 출도(出嶋)의 사람 태이(太耳)의 딸. 마타오(麻多烏)와 혼인하여 낳은 아들.

 명림어윤이 태왕의 성지를 공표하기로 한 날이 밝았다. 그는 귀족 회의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월성에 들어서는 순간 계림국의 귀족들과 대소신료들은 숨을 죽였다. 그는 계림국의 모든 대소신료 앞에서 연불 태왕의 성지를 폈다.

 계림국의 김미추를 계림국군주겸동해대왕겸우위대장군(鷄林國君主兼東海大王兼右衛大將軍)으로 봉하고 징표로 금옥새(金玉璽)와 면류관, 황포(黃袍)를 내린다.

여기저기서 한숨과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만약 귀족 회의에서 태왕의 뜻과 상반되는 결론이 맺어지고 있더라면 서라벌은 끔찍한 상황을 맞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미의 남동생 미추가 계림국의 열세 번째 군주가 되었다. 나라가 개국 되고 319년째 되는 임오년(壬午年) 정월 25일이었다. 그미는 아버지 김구도가 임종할 때 했던 약속을 지킨 것이다.

김미추(金味鄒)는 미조(未照) 혹은 미소(未召)라고도 한다. 김알지의 6대손으로 아버지는 김알지의 5대손인 김구도이고, 어머니는 지마이사금의 손녀이자 이칠(伊柒) 갈문왕의 딸 박씨(朴氏)이다. 배우자는 조분이사금의 딸, 광명부인 석씨(昔氏)이다.

명림어윤과 철갑기병들은 두 달 가까이 서라벌에 더 머물며, 새로운 군주의 즉위식까지 지켜보았다. 서라벌과 각 지방은 새 군주의 즉위를 축하하는 분위기였으며, 백성들은 차분하게 일상에 전념하였다. 계림국 전역에서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특이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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