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 용의 씨앗

수실 마을은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오십여 가구 삼백여 명의 마을 사람들은 서로 돕고 사는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이 마을에서 가장 나이도 많고 부자인 음모(陰牟)는 성격이 괴팍하고 까다롭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음모에게는 딸이 하나 있는데 아버지와 달리 심성이 곱고 인정이 많은 편이었다. 음모는 많은 농토를 가지고 있었고 머슴도 여러 명 부리고 있었다. 머슴 중에서 대장 노릇을 하는 상쇠는 새로 들어온 두 머슴, 추돌과 재생(再生)을 자주 괴롭혔다.

다른 머슴들은 못생기고 천덕꾸러기처럼 구는 데 반해 추돌은 늘 조용하고 성실하며, 꾀를 부릴 줄 몰랐다. 상쇠가 추돌을 미워하는 이유는 추돌이 대갓집 도령처럼 풍신이 반듯하고 행동거지가 모나지 않아 주인과 주인 딸의 호감을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힘든 일을 마치고 쉬려고 하면 상쇠는 다른 머슴들은 놔두고 꼭 추돌과 재생을 불러내 잠시 쉴 틈도 주지 않고 일을 시켰다. 상쇠의 말을 듣지 않으면 곧바로 발길질이 이어지거나 밥을 굶어야 할 판이었다. 머슴들은 주인 음모보다 상쇠를 더 무서워하였다.

“너희들 쇠꼴이 다른 머슴들보다 적다. 더 베어다 놓고 밥 먹어.”

상쇠는 막 점심을 먹으려고 하는 추돌과 재생에게 시비를 걸었다. 추돌과 재생의 지게에 실려 있는 쇠꼴이 다른 머슴들 지게에 실려 있는 쇠꼴보다 훨씬 많아 보였다.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끊임없이 울렸지만, 추돌과 재생은 다시 지게를 지고 쇠꼴을 베러 갔다.

추돌과 재생이 다시 쇠꼴을 베어 짊어지고 돌아왔을 때 이미 밥상은 치워지고 식모는 집에 없었다. 다른 머슴들은 배를 두들기며 낮잠을 자고 있었다.

“추돌아, 어디 아프니? 얼굴이 말이 아니네.”

주인집 외동딸은 밖에 나갔다가 추돌이 섬돌 아래에 쭈그려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추돌이 비록 머슴의 신분이기는 하나 그의 진득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추돌은 신장이 8척이고 용의 수염(龍髥)에 호랑이의 눈동자(虎瞳), 원숭이의 팔(猿臂)에 외뿔소의 어깨를 가지고 있었다.

늘 온화한 인상이나 한번 화를 내면 주변에 아무도 다가가지 못했다. 추돌과 재생이 점심도 못 먹고 쇠꼴을 베어 이제 막 들어왔다고 하자 그녀는 직접 부엌에 들어가 밥상을 차려 내왔다.

“상쇠가 너희를 골탕 먹이려고 못된 짓을 했나 보구나.”

그녀는 측은한 마음으로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는 추돌과 재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추돌이 남의 집 머슴 노릇 할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추돌과 재생이 어디에서 수실 마을로 흘러들어왔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녀가 몇 번이나 추돌에게 고향이 어디냐, 부모님은 살아 계시냐, 형제들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지만 그때마다 자신은 사고무친의 외톨이 고아라며 자세한 대답을 피하고 멋쩍은 듯 웃어넘기기만 했다.

재생은 국상 상루(尙婁)가 추돌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붙여 놓은 종자(從者)였다. 음모는 상쇠의 말만 듣고 추돌과 재생이 일은 안 하고 꾀만 부린다고 그들을 자주 혼냈다. 추돌과 재생은 상쇠의 말만 믿고 자신들을 나무라는 주인에게 서운해하였지만, 그의 딸을 봐서 하루하루 힘겹게 버텨나갔다.

한참 무더운 어느 여름날 밤이었다. 온종일 힘들게 일하고 곯아떨어진 추돌을 상쇠가 흔들어 깨웠다.

“추돌아, 재생이하고 나가서 저 개구리들을 울지 못하게 하거라.”

잠이 덜 깬 추돌이 눈을 비비며 일어나 상쇠에게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다른 머슴들은 옆에서 코를 골며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음모의 집 앞에는 논이 있었는데 밤마다 개구리들이 논에서 울어대는 바람에 음모 부부가 잠을 푹 자지 못한다고 했다. 추돌은 기가 막혔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추돌은 재생을 깨우지 않고 혼자서 논으로 나갔다. 그가 논두렁을 걸을 때는 근처에 있던 개구리들이 입을 다물다가도 추돌이 지나가고 나면 금방 울어댔다.

추돌이 돌멩이나 흙덩이를 던져도 보고 소리도 질러보았지만 그때뿐이었다. 밤이슬을 맞아가며 밤새도록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니 허기(虛飢)에 지쳐 곧 쓰러질 것 같았다. 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논두렁을 뛰어다니며, 밤새 개구리들과 전쟁을 벌였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다음 날 밤부터 추돌과 재생은 개구리들과 치열한 싸움을 하느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집주인이나 상쇠가 두 사람을 낮에 쉬게 하는 것도 아니었다. 추돌의 몸과 마음은 갈수록 피폐해져 갔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인가. 예전의 영화(榮華)는 한낱 꿈이었단 말인가.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가야 하나.’

추돌은 개구리를 쫓다 말고 잠시 논두렁에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벽하늘이 무척 맑고 선명하였다. 재생은 풀밭에 누워 눈을 붙였다. 그때 별똥별 하나가 길게 꼬리를 달고 서천으로 사라졌다. 반달이 개구리와 씨름하는 추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날도 지금처럼 반달이 하늘 가운데 있을 때였다. 숙부가 내린 사약(賜藥)을 마시고 피를 토하며, 죽어가던 아버지 돌고(咄固)는 아들에게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아들아, 빨리 궁궐을 빠져나가 멀리 피해야 한다. 네가 만약 살아남거든 아비의 복수를 하려고 애쓰지 말고 하늘의 명에 순응하면서 살아가기 바란다. 아비 말을 명심하거라.”

추돌은 피를 토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도리질을 하였다. 추돌이라는 이름은 숙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스스로 지어 붙인 가명이었다.

‘아버지, 지금쯤 저 은하수를 건너고 계시는지요? 소자, 그날 밤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떨리고 목이 메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소자는 지금 숙부를 피해 국내성에서 멀리 떨어진 비류수 인근의 향촌에 숨어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추돌은 허리춤에 있는 옥패를 꺼내 들여다보았다. 옥패에는 붉은 글씨로 ‘을불(乙弗)’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추돌의 눈가에 어느새 말간 눈물이 번지고 있었다. 추돌은 지난 악몽을 하나씩 곱씹었다.

그동안 숙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목숨을 보전하기 급급하여 지난 일들을 회상해 볼 여유가 없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는 응어리를 언제 속 시원히 풀어 볼 수 있을지 추돌은 답답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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