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 골육상잔

서기 292년 약로왕(藥盧王)이 승하하였다. 그는 중천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23년간 고구려를 통치하였다. 그는 총명하고 인자하여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왕후 우씨(于氏)는 우수(于漱)의 딸이었고 국상(國相)은 상루(尙婁)였다.

숙신족(肅愼族)이 고구려를 침입하자 약로왕은 동생인 달가(疸賈)를 출전시켜 단로성(檀盧城)을 함락시키고 숙신족 6백 여호를 오천(烏川)에 이주시켜 이미 항복한 숙신족 부락민들과 함께 살도록 하였다. 왕은 공을 세운 달가를 안국군(安國君)에 봉하고 양맥(梁貊) 및 숙신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약로왕이 292년 8월에 승하하니 그를 서천(西川) 언덕에 장사지내고 시호를 서천왕(西川王)이라 하였다.

약로왕은 장남 삽시루를 할 수 없이 태자라는 자리에 앉히기는 하였지만, 그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둘째 아들 돌고(咄固)에게 마음이 있었으나 삽시루의 생모 우후 때문에 그냥 삽시루를 태자의 위에 올려놓은 채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우후는 상당한 미색으로 색을 밝히며, 욕심이 많은 폐첩(嬖妾)이었다. 돌고의 생모인 고(高)씨도 약로대왕에게 많은 총애를 받고 있었지만, 우후처럼 힘을 쓰지 못했다. 약로왕이 갑자기 승하하는 바람에 왕의 의중이 정확히 전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후는 군권을 쥐고 있었던 왕의 아우 달가의 모든 권한을 강제로 빼앗고 밀조(密詔)를 위조하여 자신의 아들인 삽시루를 보위에 앉혔다. 삽시루가 보위에 오르면서 조정의 분위기는 완전히 변하고 말았다.

삽시루 왕은 우후를 태후로, 부인 연씨(緣氏)를 후(后)로, 소실인 다씨(多氏)를 소후(小后)로 봉하였다. 그는 태자로 있을 때부터 주변 사람들을 의심하고 자신과 뜻이 맞지 않으면 죽이거나 멀리 내쳤다. 삽시루는 태왕의 위에 오르자 곧 왕권 강화에 주력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선대왕들처럼 잃어버린 민족의 고토(古土)인 고조선이 있던 거대한 대륙의 땅을 찾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서기 3세기 무렵은 고구려에게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서기 246년 위나라 장군 관구검(毌丘儉)의 침략으로 도성인 국내성(國內城)이 점령당하기도 하였다. 중천왕 때에 양맥(梁貊) 골짜기에서 벌인 두 나라의 전쟁은 고구려의 운명을 가르는 중요한 싸움이기도 했다.

양맥 골짜기는 동천왕이 관구검과 싸워 패배한 뼈아픈 기억이 있던 장소이기도 했다. 중천왕은 이곳에서 위나라 군사 8천 명을 참살하였다. 고구려의 대승으로 두 나라 간 힘의 균형이 유지되었고 한동안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후한이 망하고 오랜 기간 각축을 벌이던 위(魏), 촉(蜀), 오(吳) 삼국은 마침내 사마씨(司馬氏)가 세운 진(晉)에게 멸망하면서 중국이 통일되었다. 진이 대륙을 통일함으로써 정세는 안정되었지만, 그 틈을 이용하여 북방 유목민족은 더욱 강성해졌다. 그들은 겨울이 되면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진나라와 고구려를 침범하였다.

특히 숙신족이 고구려 변방을 수시로 침범하여 식량을 탈취하고 백성들까지 무차별로 죽이는 만행을 일삼곤 하였다. 이때 숙신족을 궤멸시키고 숙신 부족이 사는 지역을 평정한 이가 서천왕의 아우 달가 장군이었다.

달가는 연전연승하며 숙신을 단로성으로 몰아붙였다. 유인책을 써서 숙신의 주력군을 성 밖으로 끌어내고 기습적으로 단로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비극은 약로 서천왕이 승하하고 그의 아들 삽시루가 보위에 오르면서 시작되었다. 삽시루 왕은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종(放縱)하여 남을 믿지 않았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삽시루에게는 대제국 고구려를 다스릴 자질이 부족한 듯 했다. 그의 이런 소심한 성품 때문에 즉위 초부터 백성과 조정의 중신들로부터 신망을 얻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태왕 삽시루의 고질병인 의심증은 날로 더욱 심해지고 무람하였다.

그 의심은 숙부인 안국공 달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숙신족을 토벌한 숙부 달가는 백성들과 조정의 중신들로부터도 신망을 얻고 있었다. 삽시루 왕은 숙부 달가와 이복(異腹) 아우 돌고가 자신의 왕위를 흔들 수 있는 최대 정적(政敵)이라고 판단하였다.

“안국군은 과인이 태자 시절부터 불충하였다. 또한, 오래 군권을 쥐고 있으면서 불궤지심을 품고 나라를 위태롭게 한 바가 있다. 선대왕 때에도 왕의 아우인 일우(逸友)와 소발(素勃)이 왕위를 노리고 역모를 꾀한 적이 있었다. 이에 과인은 나라를 위태롭게 한 달가를 일벌백계로 처단하여 대의멸친코자 한다.”

삽시루 왕은 마침내 수하들을 동원하여 비열한 방법으로 국민적 영웅인 숙부 달가를 죽이고 말았다. 삽시루 왕의 의심병은 더욱 악화되어 아우인 돌고와 어린 조카 을불 태자에게도 미쳤다.

“모용외가 국경을 넘어 들어와 과인이 잠시 신성(新城)으로 피신할 때 돌고는 과인의 승낙 없이 군사를 움직였으며, 부왕의 후궁인 다비(茶妃) 을씨녀(乙氏女)녀를 범해 을불이라는 자식까지 보았다. 게다가 과인의 모후인 우후(于后)까지도 넘본 패악한 자다.

이럴진대 국가의 대계를 세우고 백성들의 모범적인 생활 방식의 틀을 세우기 갈망하는 이때 어찌 이같이 무도한 자를 살려 둘 수가 있단 말인가?”

삽시루 왕은 왕실의 치부를 드러내면서까지 이복 아우 돌고에게 사약을 내렸다. 돌고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돌고는 부왕의 후궁이었던 을씨(乙氏) 사이에서 을불을 얻었다. 부왕의 승낙 하에 돌고는 을씨를 단림궁주(檀林宮主)로 칭하고 처로 맞이하였다.

을불은 돌고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약로왕의 아들이기도 한 아주 묘한 위치에 있었다. 약로왕은 을불이 도저하고 기골이 범상하지 않음을 알고 그를 태자로 봉하였다. 태자가 둘인 이상한 정국에서 약로왕이 급사(急死)하였다.

삽시루 왕은 동생의 아들이며, 조카인 태자 을불이 궁궐에서 도망치자 이에 불안을 느끼고 전국 방방곡곡에 방을 붙이고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을불 태자는 잡히지 않았다. 백성들은 왕의 숙부 달가와 아우 돌고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마음속으로 을불 태자를 측은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에 을불 태자는 백성들의 비호 아래 장기간 잡히지 않고 권토중래할 기회를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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