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부 – 을불, 신분을 밝히다

“대장, 졸본까지 가지 않더라도 소금 팔 곳은 많습니다.”

‘이제는 재모에게 나의 정체를 알려줘야 하겠어. 그래야 나의 의도를 이해하게 될 것이야. 좀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이 적기야.’

추돌은 재모의 이해를 구할 필요가 있었다. 무작정 먼 곳까지 재모와 동행하기 위해서는 그를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두 사람은 길을 걷다가 나무 아래서 잠시 쉬어 가기로 하였다. 들녘에 가을걷이하는 사람들이 널려 있었다.

“재모, 이제부터 내 이야기를 잘 들으시게.”

“대장, 무슨 말아 든 하십시오. 대장과 나 사이에 못 할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고구려 왕 삽시루가 애타게 찾고 있는 을불 태자요.”

추돌은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이력(履歷)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재모는 처음에는 추돌의 이야기를 반신반의하며, 농담하는 줄 알고 추돌의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추돌이 왕자들만 가지고 있는 금과 옥으로 장식된 신표(信標)를 내보이자, 재모는 추돌이 진짜 을불 태자라는 사실을 알고 얼른 엎드렸다.

그 신표는 고구려 왕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신분증 겸 호패(號牌)로 손바닥만 한 옥에 붉은 글씨로 이름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삼족오가 새겨졌으며, 둘레는 황금으로 마감하여 무척 호화롭게 보였다. 추돌은 그 호패를 늘 허리춤에 매달고 다니며 하루에도 몇 번씩 그 호패를 들여다보곤 했다.

“대장, 아니 태자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소인을 죽여주십시오.”

“재모, 이 순간부터 그대는 나의 참모가 돼야 한다.”

추돌은 자기 생각을 재모에게 말하였다. 나는 지금의 삽시루 왕을 권좌에서 끌어 내릴 것이다. 그는 백성들의 마음을 잃었다. 또한, 내외 정세를 읽지 못하고 실정(失政)을 하여 나라를 혼란에 빠트리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하였다.

내가 그대를 데리고 손해를 보는 소금 장사를 하는 까닭은 불쌍한 백성들의 목소리를 듣고, 나와 뜻을 함께할 동지들을 모으기 위함이었다. 재생은 죽은 전 국상 상루(尙婁)가 나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하여 붙인 종자(從者)이다.

나는 앞으로 나의 재기(再起)를 위하여 세력을 끌어모을 것이다. 그대는 나의 진정한 참모가 되어 내가 대업을 이루는 그날까지 헌신해 주기를 바란다. 추돌의 엄숙하면서 근엄한 태도에 재모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계속 엎드려 있었다. 조금 전만 하여도 소금 장사를 하던 동료가 어느덧 고구려 태자로 탈바꿈해 있었다.

“태자님, 무엇이든 지시만 하소서. 그동안 소인은 태자님이 평범하지 않은 분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언젠가는 말씀하시겠지 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재모의 이마가 땅에 닿았다.

“재모, 고맙다. 당분간은 나를 지금처럼 추돌이라고 부르고, 그 누구에게도 나의 신분을 말하면 안 된다. 나는 그대를 나의 그림자처럼 생각하겠다. 그대도 나를 믿고 나의 뜻을 따라주면 좋겠다.”

추돌은 이마를 땅에 박고 있는 재모를 일으켜 세우고 등을 다독거렸다. 2년 가까이 한솥밥을 먹은 사이였다. 친형제보다 더 우애가 깊었다. 추돌은 재모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재모는 추돌의 신분을 확실히 알게 되어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방향을 정하게 되었다.

“태자님, 이 천한 목숨 기꺼이 바쳐 태자님께서 대의를 이루도록 헌신하겠습니다. 언제든지 이놈의 목숨을 달라 하시면 드리겠습니다. 소인의 아비도 조의(皁衣)로 있다가 비명에 가셨습니다. 이 목숨 다하는 날까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재모, 고맙다. 지금까지 우리는 생사고락을 함께 해왔다.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한 위험과 험난한 상황이 닥칠 수도 있다. 합심하여 잘 대처해 나가자.”

두 사람이 졸본성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졸본성은 한때 고구려의 도읍지였으나 유리왕 때 국내성으로 도읍지를 옮기고 잠시 쇠퇴하였지만, 다시 재기하여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고구려 조정에서도 추모왕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곳이라 하여 성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성세(城勢)나 규모는 국내성보다 훨씬 못하지만, 사람들의 얼굴에는 활기가 넘쳐났다.

“태자님, 저기 객사입니다. 오늘 저기서 묵으시지요?”

“아니다. 주막을 찾아가자. 백성들의 진실한 이야기를 들으려면 주막이 좋다. 나는 저런 객사보다 어쩐지 주막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태자라는 말은 입에 올리면 안 된다. 추돌 대장이라고 불러다오.”

재모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주막을 물었다. 두 사람이 조랑말을 끌고 주막에 도착하자 젊은 사내가 뛰어나오며 안내를 하였다.

“어서 오세요. 우리 주막은 졸본성에서 제일가는 곳입니다. 주모 예쁘고, 국밥 맛있고, 탁주 맛도 기가 막히지요. 자자, 얼른 안으로 드시지요. 금방 자리가 찹니다.”

사내는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총각, 오늘 무슨 날인가. 주막에 웬 사람들이 이리 많은가?”

“내일 을지 성주님 생신이라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성주 생일에 사람들이 왜 몰려든단 말인가?”

“두 분도 내일 무술시합에 참여하려고 오신 게 아니세요?”

“우리는 소금 파는 장사치일세.”

“매년 을지 성주님께서는 생신날 무술대회를 열어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고 있습니다. 선발된 자들은 일정 기간 훈련을 받고 정식 군사가 된답니다. 이곳 젊은이들에게는 관리가 될 기회이기도 합죠.”

‘졸본 성주가 나라를 위하는 생각이 크다, 그자를 만나봐야 하겠어.’

두 사람이 주막 안마당 평상에 올라앉았다. 주막은 손님들로 넘쳐났다. 주모와 일하는 여인들은 상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평상이 모자라자 사내는 안마당과 바깥마당에 멍석을 깔아 밀려드는 손님을 받았다. 하나같이 젊은 사람들이었다.

사내의 말대로 내일 있을 무술시합에 나갈 사람들 같았다. 둘 또는 서너 명이 함께 온 것으로 보아 동무들이나 친인척 사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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