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부 – 을지연을 독대하다

“그대는 어디서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았는가? 무술대회에서 그대 같은 명궁은 처음 본다.”

“중모(中牟)님에게 배웠습니다.”

“뭐라, 주, 중모?”

추돌이 ‘중모‘라는 이름을 입에 올렸지만, 중모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이자가 미쳤나. 중모라면 추모왕(鄒牟王)인 주몽(朱蒙)을 말함인데. 어떻게 이자가 거룩한 주몽 성제(聖帝)의 존함을 감히 입에 올린단 말인가.’

을지연은 충격을 받은 듯하였다. 끙하는 소리를 내더니 다시 물었다.

“살아 있는 중모인가 아니면 돌아가신 중모인가?”

“중모님은 영원불멸입니다. 제 가슴 속에 계십니다.”

점점 더 이상한 말을 하는 추돌을 을지연은 얼른 그 뜻을 알아듣고 그를 내실로 불러들였다. 추돌이 성주의 별도의 부름을 받자 그는 재모도 함께 가겠다고 하였다. 주몽(朱蒙)은 기원전 58년에 태어나서 기원전 19년 사망한 고구려 건국 시조였다. 성은 고씨(高氏)이며, 이름은 주몽 또는 추모(鄒牟), 상해(象解), 추몽(鄒蒙), 중모(中牟), 중모(仲牟), 도모(都牟)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중신이나 장군 또는 군관 중에서도 주몽의 별명을 모두 기억하는 자는 거의 없었다. 추돌은 재모에게 눈짓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신호는 재모가 성주에게 자신의 신분을 모두 밝혀도 좋다는 뜻이었다. 추돌은 목숨을 건 도박을 하고 있었다. 운이 좋으면 천군만마를 얻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목이 떨어질 수도 있었다.

“다시 묻겠다. 조금 전에 자네가 중모에게 무예를 배웠다고 하였다. 그 중모란 누구인가?”

을지연이 근엄한 자세로 추돌에게 물었다. 바로 그때 재모가 근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성주께서는 예의를 갖추시오. 이분은 을불 태자님이시오.”

“뭐라. 을불 태자님?”

을지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성주는 어서 예를 갖추지 않고 무엇을 하시오. 무엄하오.”

재모가 굵고 묵직한 소리로 성주를 호통치는 동시에 추돌은 허리춤에서 옥패를 꺼내 보였다. 그 옥패에 분명 ‘乙弗’이라는 붉은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앗, 예전에 보았던 돌고 장군의 옥패와 똑같다. 그렇다면 이분이 을불 태자님이 틀림없다. 우리 동명당이 그토록 애타게 찾던 그분이시다.’

을지연은 얼른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도 고구려 왕자들만 지닌 옥패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고, 이전에 몇 번 본적도 있었다. 을지연의 눈에 갑자기 물기가 스몄다. 그리고 가슴이 쿵쾅거려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소신, 을지연. 태자님을 뵙습니다. 미리 태자님을 알아보지 못한 소신을 죽여주십시오.”

을지연이 이마를 바닥에 서너 번 찧었다.

“성주는 나를 삽시루 왕에게 잡아다 바치지 않으려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소신, 돌고 장군님을 뵙는 듯 하옵니다.”

“성주께서는 나의 아버님을 어찌 아시오?”

추돌이 을지연에게 물었다.

“모용외가 처음 국경을 넘어와 신성(新城)으로 피신하는 삽시루 왕을 쫓을 때 소신이 돌고 장군님을 모시고 모용외 군대 후미를 기습하여 큰 전과를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장군님께서는 큰 공을 세우시고도 삽시루 왕의 모함을 받고 억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돌고 장군님의 아드님이신 태자님을 면전에서 뵈니 장군님을 다시 뵙는 듯하옵니다.”

을지연은 눈물까지 흘려가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성주, 일어나시오. 나 역시 아버님을 모시던 그대를 보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지금 이 일은 이 방에 있는 우리 세 사람만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당분간입니다. 나의 존재가 외부에 알려지면 안 되오.”

“태자님, 소신의 절을 받으십시오. 이제야 소신의 뜻 하나가 이루어졌습니다.”

을지연은 추돌에게 큰절을 하였다. 추돌은 뜻하지 않게 졸본성주를 만나게 된 것 역시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였다. 추돌은 재모를 밖으로 내보내고 을지연과 독대(獨對)하였다. 추돌이 술병을 들어 을지연 잔에 따랐다. 을지연이 황송하여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잔을 받았다.

“성주는 지금의 삽시루 왕을 어찌 생각합니까?”

“그는 왕재(王才)가 아닙니다. 이미 민심은 그를 버렸습니다.”

추돌은 을지연의 얼굴을 뚫어지게 쏘아 보았다. 그의 얼굴 어디에서 모사(謀事)나 배신의 기미는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을 믿고 가슴속에 숨겨둔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는 을지연을 한편으로 고맙게 여기면서도 아직은 속내를 모두 쏟아내기에는 조심스러웠다.

을지연은 그동안 자신과 뜻이 맞는 지방의 장관들에게 연통하여 을불을 찾고 있었다. 물론 조정에도 친분이 있는 중신들이 더러 있었으나, 그들을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그들 중에 박작성주, 오골성주, 요동성주, 개모성주, 남소성주 등과는 속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들은 오골성의 성주가 중심이 되어 비밀결사인 동명당(東明黨)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들이 동명당을 결성한 것은 삽시루가 왕이 되면서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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