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부 – 거듭되는 삽시루의 실정

창조리의 목소리에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삽시루 왕에 대한 실망감과 새로운 왕재(王才)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나라가 망조에 드는 길은 왕이 정사를 뒤로하고 계집과 술에 빠져 살고, 신하를 능력에 따라 적재적소에 쓰지 않음에 있습니다.

또한, 계집들의 치맛자락에 따라 인사를 하면서 국정에 경험이 많은 원로들의 말을 듣지 않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말씀을 듣고 종합적으로 판단해보건대 여러분들은 삽시루 왕의 정책에 불만이 많으십니다.

또한, 특별 대책이란 굳이 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그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실 겁니다. 우풍 대인께서 방금 말씀하셨듯이 우리 고구려는 끊임없이 움직여야 합니다. 창천을 날던 새가 잠시 한눈을 팔고 날갯짓하는 것을 잃어버린다면 새는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말 것입니다. 이제 여러 대인님의 속마음을 알았습니다. 이 사람이 대책을 마련하여 여러분께 제시하겠습니다.

고구려 태왕의 위(位)는 홀로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하여 존재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만백성을 보듬고 그들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 주면서 배곯지 않게 해줘야 합니다. 백성은 착취의 대상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백성은 곧 하늘입니다. 즉, 민심이 천심입니다.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함은 하늘이 태왕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께서 제가 대책을 추진할 경우 지지해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창조리가 열변을 토하자 좌중은 고요하였다.

“옳습니다. 국상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대책을 바로 이 자리에서 말씀해 주십시오. 이미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국상, 대책을 지금 말씀하셔도 됩니다.”

조불과 소우가 창조리에게 지지의 뜻을 보내며, 대책을 즉시 공표하라고 채근하였다.

‘그래. 좋다. 이 자리에서 공표하자.’

“좋습니다. 대책을 말씀드리고 여기 계시 대인들께서 해야 할 각자 임무를 알리겠습니다.”

창조리는 대책으로 생각하고 있던 복안(腹案)을 발표하기로 마음먹었다. 복안의 핵심은 삽시루를 권좌에서 끌어 내리고 을불 태자를 새로운 태왕으로 앉히는 거 였다. 대인들은 창조리의 대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각자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조불, 조우, 오맥남 대인은 내일부터 을불 태자를 수소문하여 소재를 파악하시오. 그리고 우탁(于卓), 을로(乙盧), 을보(乙寶), 창멱(倉覓), 우풍(于豊) 대인은 조정 대신들을 개별 접촉하여 지지 기반을 확보하시고, 지방 장관들은 우군으로 접수해주시오. 또한, 도성과 가까운 성주들을 우군으로 확보해야 유사시에 우리의 거사가 탄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특히 오골성과 졸본성 그리고 개모성, 남소성을 반드시 우리 우군으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오골성주 해사갈은 나의 심복이나 다름없습니다. 해사갈을 따르는 일단의 성주들이 힘을 합할 것입니다. 우리는 중앙군을 장악하고 해사갈 성주가 지방 성주 몇몇을 포섭하면 일은 쉽게 마무리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 일은 제가 중심이 되어 이끌겠습니다. 창조리는 이야기를 마치자 거사 계획안을 적은 문서를 회람(回覽)토록 하고 아래에 연서(連署)하도록 하였다.

국내성의 밤은 깊어만 가고 창조리의 집에 모인 중신들의 마음은 이미 한뜻이 되어 천지개벽을 준비하고 있었다. 중신들이 회람한 문서가 발각될 경우 연서한 자들은 목이 달아나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날 일이었다. 창조리는 보안을 강조하며 특히 입 조심할 것을 당부하였다.

간밤에 오골성주의 생일을 맞이하여 진탕 마시고 흥겨운 시간을 보낸 동명당 소속 성주들은 늦은 아침에 일어나 별도의 방에 모여들었다. 말술을 마시는 호주가 오골성주 해사갈과 요동성주 고해사는 아직도 술이 덜 깬 듯 보였고, 개모성주 명림모달과 남소성주 대중걸은 일찍 일어나 부하들과 격구를 하며 몸을 풀었다. 을불은 술을 즐기지 않는 을지연과 앞으로의 계획을 짜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 재모는 잠시도 을불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를 호위하였다.

해가 중천에 있었다. 오골성주는 부하들에게 푸짐한 오찬을 준비시켰다. 밤새 술을 마시느라 속이 얼얼해진 성주들과 그들의 참모들은 속을 달래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찬이 끝나고 바로 중대 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는 을불과 재모 그리고 6명의 성주와 그들의 참모 등 20여 명이 원탁에 빙 둘러앉았다. 원탁 한가운데 을불이 앉고 나머지 성주들과 참모들이 좌우로 앉았다. 을지연의 회의를 알리는 선언이 있고 을불이 인사말을 하였다.

“지난밤은 참으로 오랜만에 심신이 편안했습니다. 오늘 회의는 앞으로 우리 동명당이 추구할 전략과 전술을 공표하고 그에 따른 여러분들의 가감 없는 의견을 청취하는 자리입니다. 이미 우리는 한배를 타고 항해를 하는 중입니다. 그 배가 순항하여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할 때까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습니다. 먼저 졸본성주의 설명을 경청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병력 증원 방안에 대한 건 입니다.”

을지연의 설명이 있었다. 현재 동명당이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은 12만 명밖에 안 되기 때문에 추가로 5만 명의 병력 확보가 있어야 대의를 완수하는데 안심할 수 있다. 지금의 상황에서 중앙의 군사를 이끄는 장관들과 지방의 욕살이나 막하라수지(莫何邏繡支)들을 추가로 끌어들이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병력을 추가로 확보할 방안이 있는가.

“옥저나 동예 혹은 양맥 숙신 지역의 세력들을 접촉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들은 삽시루 왕에게 불만이 많습니다.”

요동성주 고해사가 의견을 주었다.

“최체부(最彘部)는 옛날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의 직할지였으나 지금은 독립적인 군사 기반을 지닌 지역 군벌(軍閥)이 되었습니다. 또한 점제부(秥蟬部)는 개마대 지역의 강자로 많은 병력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 두 부족의 기마병들은 용감하기로 소문났습니다.”

저작권자 © 남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