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부 고구려 태왕에 추대되다

 이때는 6개 성의 성주뿐만 아니라 해사갈의 공작으로 창조리의 좌우 보좌역을 맡은 북부대인 조불(祖弗), 동부대인 소우(蕭友), 남부 대인 오맥남(烏陌南), 을불의 외조부인 을보(乙寶)까지 참석하였으며, 박작성주의 공작으로 박작상단 단주인 어림뿐만 아니라 오골상단의 단주인 제갈소(諸葛召)까지 참가하였다. 참석자들은 지금 국내 정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어느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소신, 태자님을 뵙습니다.”

을보는 외손자인 을불을 보고 너무 감격스러워 소리 내어 울기도 하였다. 그는 창조리의 밀명을 받고 조우와 소우 그리고 오맥남을 대동하고 비밀리에 회의에 참여하게 되었다.

“박작상단 단주 어림과 오골상단 단주 제갈소 태자님을 뵙습니다.”

그들은 박작성의 성주에게 포섭되어 을불을 만나기 위하여 왔다.

“잘 오시었소. 앞으로 나를 위해 애를 써주시오.”

을보와 해사갈은 이미 삽시루를 왕위에서 끌어 내리기 위한 작전계획안을 짜놓고 있었다. 그 계획은 국상 창조리가 초안을 잡고 해사갈을 위시한 동명당에서 부분적으로 보완한 삽시루 왕 퇴위 계획이었다.

이미 고구려 모든 백성과 조정의 중신들 그리고 각 지방의 장관들이 삽시루 왕에게 등을 돌린 상태에서 당장 대군을 이끌고 국내성으로 밀고 들어가도 되지만 그것은 만백성이 원하는 방식이 아닌 듯 하여 을불은 고심하고 있었다. 을불이 고심하고 있자 을보가 외손자 을불을 설득하였다.

“태자님, 이미 성찬은 준비되었습니다. 결단만 내리시면 됩니다. 하루속히 삽시루를 왕위에서 끌어내려 만백성의 고충을 덜어주셔야 합니다. 지금이 적기입니다. 계획은 이미 마련되어 있습니다.”

“할아버님께서 향후 계획을 발표하여 주세요.”

을불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동명당 및 조정 중신들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을불은 참석한 모든 사람을 한데 모이게 하고 삽시루 왕을 퇴위시키기 위한 계획을 발표하였다.

“을불 태자님과 조정의 중신 그리고 동명당 여러분의 중지를 모아 대의를 위한 작전계획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을보의 긴장된 음성이 대청을 울렸다. 집결한 모든 사람은 침을 삼키며 과연 어떤 작전계획이 발표될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각 성에서 무예에 뛰어난 자 100명씩 차출하여 모두 600명을 가짜 을불 태자로 꾸민 다음 고구려 전역을 돌아다니며, 탐관오리를 습격하고 곧 을불 태자가 고구려의 태왕이 된다는 소문을 내도록 한다.

각 성주는 국내성 침공을 위한 기동 훈련을 시행하여 군사력을 결집하고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군량미 확보 및 각종 무기류를 점검한다. 창조리를 비롯한 동명당과 뜻을 함께하는 조정의 제신들은 특수 공작대를 만들어 나머지 중신들을 설득 또는 회유하여 아군 편으로 만들고 포섭이 어렵다고 판단되면 즉시 척살한다.

별동대 100명을 조직하여 도성에 침입하여 지금 짓고 있는 서천 신궁을 불 지른다. 제1군은 오골성, 박작성, 졸본성 병력 7만 명을 편제하고 을불 태자와 해사갈 성주가 총지휘하고 사중해 성주와 을지연 성주가 보좌하여 압록수를 따라 국내성으로 이동한다.

제2군은 요동성, 개모성, 남소성 그리고 최체와 점제부 병력을 포함한 7만 명을 편제하고 총지휘는 요동성주 고해사가 하고, 명림모달과 대중걸 성주와 최체부 점제부 족장이 보좌한다.

제2군은 남소성에서 집결하여 남하하면서 아군의 편에 흡수되지 않은 옥저성(沃沮城)을 포위한다. 성주를 아군 편으로 접수하는데 어렵다고 판단되면 성을 공격하여 제압한다. 조불, 소우, 오맥남은 휘하의 병력 6만 명을 이끌고 제1군과 만나 연합전선을 펼친다. 모월 모일 모시를 기하여 이 작전은 시작된다.

작전 다음 날 국상 창조리와 조정 중신들은 삽시루 왕을 사냥을 빙자하여 유인한 다음 사냥터에서 체포한다. 왕이 사냥을 떠나는 날 준비된 모든 병력을 국내성 근처에 집결시키고 을불의 최종 명령을 기다린다.

이 계획은 특급 비밀이니 거사가 시작되는 그날까지 보안 유지에 철저히 하기 바란다. 작전계획이 공표되었다. 각 성주와 조정 중신들 그리고 두 상단의 단주들은 잠시 얼이 나간 듯 창망하게 앉아 있었다.

“을불 태자님을 위하여 만세 삼창을 합니다.”

을지선 성주가 소리쳤다. ‘을불 태자 만세’ 소리가 오골성에 울려 퍼지면서 긴급회의는 끝났다. 고구려 전역이 마치 폭풍 전야와 같은 긴장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삽시루 왕은 궁궐 공사장에 나가 공사가 지지부진하다며 관리들을 질책하며 조바심쳤다.

“뭐라,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로 을불이 나타나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주면서 관리들을 해치고 있다고?”

“폐하, 서천 신궁에 불이 났습니다.”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에 삽시루 왕은 우두망찰 긴장하였다. 그는 전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빨리 을불을 잡으라고 호통을 쳐댔다. 전국에 흩어진 600명의 가짜 을불들은 작은 자루에 곡식을 담아 끼니를 거르고 있는 어려운 백성들에게 나눠주었고 백성들은 그것을 ‘을불곡(乙弗穀)’이라 하였다.

가짜 을불이 잡혀도 군사들은 그를 죽이지 않고 대신 짚으로 된 인형을 만들어 목을 잘라 도성으로 보냈다.

“폐하, 분명 을불의 목을 쳤는데, 가져오는 도중에 짚으로 변했습니다.”

“그놈이 이제 도술을 부린단 말이오?”

도성에도 을불에 대한 괴소문으로 뒤숭숭하였다. 이제는 삽시루 왕의 명령이 군사들과 관리들에게 먹혀들지 않았다. 삽시루는 궁성에서 혼자 왕 노릇을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폐하, 요즘 여러 가지로 머리가 혼란하실 텐데, 사냥이라도 한번 가시어 머리를 맑게 하시고 성심을 정갈하게 하소서.”

“지금 을불놈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러운데 사냥이 다 뭐요?”

“폐하, 이런 때일수록 백성들에게 폐하의 건재함을 보이셔야 합니다. 을불의 간계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시면 중신들과 백성들이 폐하의 영민함에 감탄할 것입니다.”

“듣고 보니 일리 있는 말이오.”

창조리의 말에 삽시루 왕은 연후(椽后), 초후(草后), 탐씨(耽氏), 을씨(乙氏) 그리고 우태후(于太后)를 거느리고 사냥하기로 하였다. 음력 9월 하순 삽시루 왕이 후산(侯山)으로 사냥을 떠났다. 초후의 아버지 상보(尙寶)와 장군 우자(于刺), 국상 창조리와 여러 중신이 왕을 따랐다. 삽시루 왕이 사냥을 떠난다는 연락을 받은 을불은 호위 무사를 대동하고 후산으로 떠났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사냥이 시작되었다. 삽시루 왕과 비빈들이 앞장서고 중신들이 뒤를 따랐다. 왕 일행이 계곡 중간쯤 왔을 때였다. 국상 창조리가 갈댓잎을 관에 꽂으며 소리쳤다.

“나와 마음을 같이할 자는 갈댓잎을 관에 꽂아라.”

창조리의 말에 따르던 중신들과 호위 군사들 모두가 관에 갈댓잎을 꺾어 꽂았다. 그리고 칼을 빼 들고 외쳤다.

“극악무도한 삽시루를 처단하라.”

“삽시루를 죽여라.”

신하들과 호위 군사들이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삽시루는 혼자 말을 몰아 도망쳤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삽시루는 군사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순식간에 삽시루 왕은 오랏줄에 꽁꽁 묶이는 신세가 되었다.

“이놈들, 이게 무슨 짓이냐? 나는 고구려의 태왕이니라.”

“당신은 이제 태왕이 아니오. 우리의 태왕은 저기 오시는 분이시오.”

군사가 백마를 타고 오는 을불 일행을 가리켰다.

“뭐라, 저, 저놈은 을불이 아니더냐. 여봐라, 어서 저놈을 잡아라.”

“숙부, 오랜만입니다.”

을불이 삽시루 앞에 나타났다. 그는 황금색 용포(龍袍)와 황금 왕관을 쓰고 있었고 좌우에 수십 명의 갑사와 병사들이 그를 호위하고 있었다.

“네놈이, 네놈이 기어이 나를 욕보이는구나.”

삽시루가 을불을 노려보며 호통을 쳤다.

“이놈, 삽시루야. 입을 조심하거라.”

갑사 한 명이 삽시루에게 발길질을 하자 삽시루는 배를 움켜쥐고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삽시루를 따르던 비빈들과 태후 그리고 왕자들은 모두 겁에 질려 땅바닥에 엎드려 을불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고구려의 새로운 태왕이신 을불님이시다. 모두 예를 갖추어라.”

창조리가 칼을 빼 들고 소리를 치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을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을불이 사자후를 토해냈다.

“삽시루는 선대왕의 조서를 위조하여 부정하게 고구려 태왕의 위에 앉았다. 그리고 무고한 왕실의 사람을 죽였으며, 황음을 일삼아 외적의 침입을 유발해 국정을 혼란케 하였다. 굶주린 백성들을 동원하여 무모하게도 궁궐을 새로이 짓는 등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렸다. 이에 나 을불은 만백성의 뜻에 따라 삽시루를 퇴위시키고 고구려 태왕의 위(位)를 받노라.”

조정의 중신들과 만백성들의 환호 속에 을불은 국내성으로 무혈입성하였다. 을불은 고구려 제15대 태왕에 등극하였고, 삽시루는 두 아들과 함께 자결하였다. 나라에서는 그를 봉상 언덕에 묻고 봉상왕(烽上王)이라 불렀다. 이때가 서기 300년, 추모왕이 고구려를 건국한 지 337년째 되는 해였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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