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등령 전설<6>소녀의 기도

 안동, 영양, 봉화, 울진, 영주 등에 거주하는 영남지역 사람들은 한양으로 가려면 죽령(竹嶺)을 넘어 제천의 험준한 시랑산의 이등령을 넘어야 하므로 수백 년 동안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향하는 수많은 영남 선비들은 제천 땅 이등령에 무수한 발자국 남겼다.

그러나 험준한 재를 넘는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시랑산에는 자주 산 도적이 출몰하여 한양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괴롭혔다.

또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꼬리를 물고 있어 혼자서 재를 넘는 일은 목숨을 걸지 않으면 감행하기 힘든 일이었다. 어쩌다 초행길의 사내들이 험한 산세를 모르고 재를 넘다 길을 잃어 변을 당하는 일도 있었고 다행히 길을 헤매다 박달처럼 시랑산 아래 벌말에 발길이 닿아 마을에서 하룻밤 묵어가곤 했다.

피곤하였지만 선녀처럼 보기 드문 금봉에게 혼을 빼앗겨 버린 박달은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자리에 누웠다 일어났다를 반복하였지만 좀처럼 금봉의 아리따운 자태는 과거를 보러 가는 박달의 가슴을 들뜨게 하였다.

그러나 남녀가 유별하며 하룻밤만 묵고 떠나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아쉽기만 하였다. 잠을 청하려 하여도 삼삼한 금봉의 아리따운 자태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천정에도 방바닥에도 심지어 책을 읽으려고 책을 펼쳐도 온통 첫눈에 박달의 마음을 단숨에 훔쳐 간 산골 처녀의 아름다운 모습뿐이었다. 속으로 천을 거꾸로 세며 잠을 청하였지만 그럴수록 금봉의 붉은 뺨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한 사나흘 묵었다 갈까? 한별 낭자 아버지도 나를 싫어하는 표정은 아닌 것 같은데. 마침 다리도 다치고 몸에 신열이 약간 있는데…….’

 박달은 잠이 오지 않아 밖으로 나왔다. 방을 나와 마당을 서성거리다 밖으로 바람이나 쐬러 나갔다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대문 빗장이 질러져 있지 않았다. 박달은 집을 나와 동구 밖을 향해 걸었다. 처음에는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천천히 둘러보니 마을은 산세가 수려하고 아늑한 지형에 둘러 쌓여있었다. 좁은 마을 길을 따라 한참 걸으니 물소리가 들렸다.

시원한 밤공기와 구수한 산촌 내음이 가슴속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박달 도령은 발이 가는 대로 무작정 걸었다. 산이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서자 풀벌레 소리가 사방에 진동했다. 은하수가 밤하늘에 하얗게 흩뿌려져 있는데 금방이라도 꽃잎으로 변해 떨어질 것 같았다.

반달이 하늘 한가운데에서 서천으로 서서히 흐르고 있었다. 달빛에 자세히 사방을 살펴보니 사방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서 자신이 넘어온 시랑산과 구학산이 마왕처럼 떡 버티고 앉아서 벌말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장엄하고 웅장하여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박달은 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자신도 모르게 발길을 옮겼다. 저만치에 조그마한 집이 희미하게 보였다. 물레방앗간 같았다. 박달은 물레방아를 가까이 보고 싶었다. 그의 고향 집 옆에도 물레방아가 돌고 있었다. 물레방아가 있는 곳에 가까이 왔을 때 박달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물레방아가 돌고 있는 옆에서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달님, 달님, 이 소녀의 말씀 좀 들어보세요. 오늘 밤 소녀는 꿈속에서 만났던 임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시는 분이랍니다. 소녀가 꿈속에서 뵙던 분이 분명합니다. 그 임께서 차마 저를 찾아오실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훤칠한 키, 둥근 달처럼 생기신 하얀 얼굴, 붉은 입술, 바라보고 있으면 빠져버릴 것 같은 맑은 눈동자, 굵고 점잖은 목소리, 분명히 소녀가 꿈속에서 뵙던 그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꿈처럼 소녀 앞에 나타났습니다. 소녀의 가슴은 쿵쾅거리고 떨려서 그분 앞에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습니다. 소녀의 떨리고 사모하는 이 심정을 어떻게 하면 그분에게 말씀드릴 수 있나요? 달님, 대답 좀 해주셔요. 소녀는 오늘부터 밤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거 같아요. 꿈속의 임이 저를 찾아오셨는데 소녀가 어찌 잠들 수 있겠어요. 지금, 이 순간도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답니다.”

조용히 들려오는 소녀의 기도는 더욱 간절하여 달님이 반드시 소녀의 청을 들어줄 것만 같았다. 박달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은 금봉이 분명하였다. 박달은 좀 더 가까이 다가가 금봉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금봉은 방금 기도한 내용을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달님에게 빌고 또 빌었다.

‘이렇게 늦은 밤, 한별 낭자가 잠도 자지 않고 홀로 나와 있다니…….’

박달은 방금 금봉이 혼잣말로 한 그 임이 자신이란 것을 알고 가슴이 뭉클하면서 한편으로 울렁거렸다. 생면부지의 처녀와 총각이 늦은 밤 깊은 산골에서 달을 바라보며 한 장소에서 가슴을 울렁거리며 있다는 이 기이하고 신비로운 인연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는지 아무도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낭자도 나와 같은 감정이로구나. 그러나 난 내일이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떠나야 할 몸으로 우연히 만난 처자의 가슴에 상처를 줄 수 없는 일이다.’

박달은 속으로 고민하였다. 지금 금봉 앞에 나타나면 그녀와 사랑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첫눈에 반한 그녀에게서 도망친다는 것은 사내로서 할 행동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것을 나 자신도 이 야릇한 감정을 숨길 수 없어. 다가가 보는 거야. 만나서 이것이 어떻게 된 인연인지 알아보는 거야. 이 건 분명 이전에 무슨 말 할 수 없는 사연이 있은 게 분명해.’

박달은 길게 호흡을 서너 번하고 헛기침을 두서너 번하였다. 그리고 천천히 금봉에게 다가갔다.

“어머나, 바, 박달 도령님. 밤이 이슥한데 주무시지 않고요?”

금봉은 뜻밖에 박달이 나타나자 깜짝 놀라면서도 한편으로 속으로 기뻐하였다. 자신이 방금 달님에게 한 기도를 달님이 들어 준 거로 생각했다.

“잠을 청할 수 없어 잠시 바람이나 쐴까 하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낭자를 만나다니 참으로 반갑고도 신기합니다.”

달빛을 받은 금봉의 얼굴에 희색이 가득해 보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은밀한 만남에 두 사람은 묘한 감정이 들면서 열정이 서서히 끓어올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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