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등령 전설<8> 몽중인과 운우

한별은 어려서 어머니 봉양댁과 자주 외할아버지댁에 다녀오곤 했다. 그러나 차츰 나이를 먹어가면서 밖으로 나가는 일이 부담스럽고 귀찮아지기도 하였다. 마을에는 또래 사내들과 여자 친구도 서너 명 있었다. 한별이 가장 가깝게 지내는 친구는 봉희였다. 그녀는 한별과 마음이 잘 맞고 부모들도 서로 왕래가 잦았다.

“아니요. 그대는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여인 중 가장 어여쁘고, 아침 이슬을 머금은 한 송이 백합처럼 청초하오. 자용염미(姿容艶美)라는 말은 그대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소.”

박달은 어둡기는 하지만 한별의 반짝이는 눈을 바라보면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무진 애쓰고 있었다. 심장은 쿵쾅거리고 무슨 말을 하긴 해야 하겠는데 어떻게 이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나가야 할지 몰랐다.

“도령님, 저를 놀리지 마시고 그냥 평범한 산골 소녀로 봐주셔요.”

“아니요. 진심이오. 내 비록 과거를 보러 가는 처지이오만,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때 가슴이 울렁거리고 눈앞이 캄캄하여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오. 과거 공부를 하느라 여인들을 만나볼 여유가 별로 없었고 또한 관심도 가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반쯤 정신이 나가서 멍한 상태라오.”

“진정이세요?”

한별이 박달의 달콤한 말에 동요하여 살포시 고개를 돌려 희미하게 보이는 그의 조각 같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흐릿한 달빛 아래지만 박달의 얼굴 윤곽은 또렷하였다.

“한별 낭자, 진정이고말고요.”

“도령님, 지금 저의 심정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녀가 용기를 내어 궁금한 점을 물어보고 싶었다. 물어보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될 것 같았다.

“되다마다요. 말해 봐요.”

한별은 이제 어둠 속에서 박달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한별의 눈씨가 어찌나 강하던지 박달은 괜히 주눅이 들었다. 한별은 박달이 부끄러워할 정도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나를 왜 이리 쳐다보는 거지? 내가 도둑놈이나 파락호처럼 보이나, 아니면 처녀들을 달콤한 말로 꾀어 몹쓸 짓이나 하는 놈팡이로 보이나?’

박달 역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반쯤 넋이 나간 듯했다. 한별은 박달을 보면서 지난봄부터 그녀의 꿈속에 나타났던 헌헌장부를 떠올렸다.

한별이 꿈에서 친구들과 이등령으로 봄나물을 캐러 올라갔었다. 지천으로 핀 진달래에 홀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꽃밭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그만 친구들과 헤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친구들을 찾기 위하여 이리저리 헤매다가 산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말았다.

‘이상하다. 분명히 예전에 자주 다녔던 길이었는데…….’

한별은 익숙한 길을 찾기 위하여 밭은 숨을 내쉬며 사력을 다했지만, 사방에 안개가 자욱하여 그 길을 찾을 수 없었다. 한나절을 헤맨 끝에 어느 오두막집에 이르게 되었다. 산속을 헤매느라 허기도 지고 다리도 아파서 그녀는 그 집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하였다. 그녀는 주인도 없는 집에 들어와 부엌을 살피다가 따뜻한 밥과 찬이 푸짐하게 차려진 밥상을 발견하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하였다.

허기진 참에 먹는 밥은 꿀맛 같았다. 밥을 먹고 나니 졸음이 몰려왔다. 한별이 얼마를 잤는지 모르지만, 인기척에 눈을 떴을 때 깜짝 놀랐다. 그녀는 아늑한 방 아랫목에 이부자리를 덮고 누워있었다. 호롱불이 켜져 있어 방안의 살림살이가 희미하게 보였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든 한별은 일어나 방문을 열어 보았다. 사방은 이미 캄캄하고 하늘의 별들이 낮게 내려와 반짝거렸다. 소쩍새가 피를 토하고 이름 모를 산새들이 지저귀면서 날아다녔다. 차가운 밤공기에 정신이 든 한별이 마당으로 나가려 하자 인기척과 함께 한 사내가 나타났다.

“잘 주무셨는지요? 나는 이곳에 사는 사람입니다. 낮에는 산속에 들어가 나무를 하고 밤에는 책을 읽는답니다. 잠시 산에 가서 일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낭자께서 마루에서 잠이 들어있어 방으로 모셨습니다.”

사내는 공손한 자세로 한별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첫눈에도 사내는 침착하고 도저해 보이면서 오달져 보였다. 또한, 외모도 상당히 준수하고 듬직해 보였다.

“제가 실례를 하였습니다. 주인도 없는 집에 함부로 들었습니다. 도령님, 용서하셔요.”

한별이 일어나 반절로 인사하며 사내를 어려워하자, 사내는 빙그레 웃으며 신경 쓰지 말라고 하였다. 그녀는 사내에게 너무 미안하여 그의 얼굴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였다. 한별이 부모님이 기다리고 있어서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고 하자 사내가 말렸다.

“이미 밤이 깊었습니다. 골짜기마다 운무가 끼어 저미합니다. 또한, 이곳은 깊은 산속이라 지금 나가시면 호랑이와 늑대 같은 사나운 짐승들을 만나기 쉽습니다. 기왕에 오셨으니 하룻밤 주무시고 가시지요.”

그제야 한별은 사내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이럴 수가. 세상에 이렇게 잘난 남자가 깊은 산중에 혼자 살고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돼.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야. 꿈일 거야.’

한별은 사내의 선풍도골에 그만 넋을 잃고 멍하니 사내를 바라만 보았다.

“낭자, 내 얼굴에 무엇이 묻었습니까?”

“아, 아니옵니다.”

수줍음이 많은 사내 역시 한별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한별은 사내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가슴만 울렁거리고 정신이 아득하여 말을 할 수 없었다.

‘처음 보았을 때도 참한 처자였지만 가까이 보니 정말로 경국지색(傾國之色)이로다. 우연히 처자를 만나게 되었지만 정말로 보기 드문 미인이야. 분명 하늘이 나의 외로운 처지를 아시고 도우신 게 분명해. 어릴 때 들은 나무꾼과 선녀의 이야기가 오늘 나에게 일어난 거야. 하늘이 나에게 기회를 주신 거야.’

사내는 마른 침을 삼켰다. 무슨 말을 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입안에서 뱅뱅 돌뿐이었다. 그는 한별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 한별과 눈이 마주치자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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