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등령 전설<9> 비몽사몽간

 “저어…….”

사내는 말을 잇지 못했다.

“도령님, 말씀하셔요.
“……."
"괜찮습니다. 말씀하시어요."

“한별 낭자, 이것도 인연입니다. 저는 늘 천지신명님에게 저의 배필이 될 여인과 인연을 맺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였습니다. 오랫동안 제가 간절히 빌고 빌어온 결과가 오늘 나타난 것 같습니다. 저는 한별 낭자를 처음 본 순간 천지신명님이 제 소원을 들어주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낭자께서는 천지신명께서 보내주신 분이 분명합니다. 저의 아내가 되어 주십시오.”

“네에? 어떻게 처음 만난 사이인데, 혼인을…….”

“낭자는 저의 배필이 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틀림없습니다.”

사내는 진실로 신에게 기도한 결과로 한별이 찾아온 거라고 믿고 있었다.

‘어쩌면 이 도령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지난해부터 부모님께서 나의 배필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다니셨어. 그러나 신랑감은 부모님이 정해줘야 하는데,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만난 알지도 못하는 사내와 어떻게 백년가약을 맺는단 말인가.’

한별은 다소곳이 앉아 사내의 훤칠한 외모를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낭자, 제 청을 들어주십시오. 저는 낭자를 배필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오늘 밤이 지나면 오늘의 인연이 모두 물거품이 될 것 같습니다. 부디, 제 청을 들어주십시오. 정화수라도 한 그릇 떠놓고 예를 올리는 게 어떠한지요?”

사내의 청이 너무 간절하여 만약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어찌해야 하나? 아버지, 어머니에게 알리지도 않고 이 사내와 예를 올려야 하나? 그러나, 이 남자를 놓칠 수 없어. 어찌해야 하지…….’

한별은 생각에 잠겼다.

“한별 낭자, 제 청을 들어주세요. 저와 부부의 연을 맺는다면 이 목숨 다하는 날까지 오로지 그대만을 위하며 살겠소. 진심이오.”

사내는 한별에게 엎드려 애원하다시피 했다. 이 밤이 지나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산속에서 만난 생면부지의 사내와 예를 올린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가당치 않은 일인지, 잘 알고 있는 그녀는 주저하고 있었다. 한별이 고민하는 사이에도 사내는 그녀에게 청을 들어달라고 애원하다시피 했다. 거의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좋아요. 도령님, 제가 도령님의 아내가 되어드리지요. 그렇지만 방금 저에게 하신 말씀대로 도령님이 세상 다하는 그 날까지 저를 버리시면 아니 됩니다. 약속하실 수 있지요?”

한별은 마음을 다잡고 사내를 쏘아보았다.

“그럼요. 그렇게 하고 말고요.”

두 사람은 소반에 정갈한 정화수 한 그릇 올려놓고 예를 올렸다. 한별은 예를 올리면서도 웃음이 났다.

“고맙소, 내 그대를 죽을 때까지 은애하리다. 정말로 고마워요.”

우연히 발길이 닿은 첩첩산중에서 한별 아가씨 금봉은 낯선 사내와 인연을 맺고 첫날 밤을 맞았다. 사내는 어녀술(御女術)이 능숙하여 한별을 금방 열락(悅樂)의 도가니로 인도하였다. 동방(洞房)을 은은하게 밝히는 화촉(華燭)은 새벽이 될 때까지 꺼질 줄 몰랐다.

 ‘아니, 이 낭자가 날 왜 이리 쳐다보는 거지?’

“내 얼굴이 이상하오? 그리 쳐다보니 내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박달이 겸연쩍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한별은 박달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돌부처처럼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분명하옵니다. 분명하옵니다.”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듯 한별은 중얼거렸다.

“한별 낭자, 무엇이 분명하다는 것이오?”

“도령님은 분명히 저의 꿈에서 현몽하신 그때 그 헌헌장부님이 분명하옵니다. 저와 혼인까지 하셨습니다.”

한별은 신기한 듯 박달을 다시 한번 자세히 쳐다보았다.

“내가 그대의 꿈에 나타났고, 혼인까지 했단 말이오?”

박달은 한별 아가씨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산골 처녀가 자신을 우습게 여겨 마음에도 없는 말을 꾸며대며, 어떻게 해보려는 흰수작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과 진지한 태도에서 박달은 그녀가 자신을 속이려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네. 분명하옵니다. 분명히 저와 부부의 연을 맺고 난 뒤로도 자주 나타나셔서 저를 은애하여 주셨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 정말로 믿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진실하게 들렸다.

‘은애?’

“아, 그래요? 분명 내가 그대 꿈에 나타나 부부의 연을 맺었단 말이지요? 한두 번도 아니고 자주 나타나서요?”

박달은 인연을 맺었다는 말에 흥분하였다. 한별의 이야기에 그는 깊은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기분이 몽롱하기도 하고 그 같은 이야기를 듣고 무엇을 어찌해야 좋을지 당황하였다.

“네에. 그렇습니다.”

‘내가 이 낭자와 전생에 무슨 인연이라도 쌓았었나? 나는 처음 보는데, 희한하네. 내가 이 낭자의 꿈에 나타나 자주 인연을 맺었다니? 이것은 또 무슨 예상치 못한 경우란 말이냐. 그렇다면 혹시……?’*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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