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등령 전설<10> 남선과 여선

 박달이 과거를 위해 책과 씨름을 하다가 잠시 피곤하면 낮잠을 자곤 했다. 그런데 그의 꿈에도 묘령의 여인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또다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등 기이한 꿈을 서너 번 꾼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박달은 그 꿈을 잡몽(雜夢)으로 치부하고 했었다.

박달이 공부하는 고향 집 사랑채 벽에 신선도(神仙圖)가 걸려 있었는데, 그 그림에는 남,녀 신선이 주연(酒宴)을 즐기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누가 그 그림을 벽에 걸어놓았는지 모르지만 박달이 어릴 적부터 늘 보아 온 터였다.

남선(男仙)은 복숭아나무 아래서 술이 든 호리병을 들어 술을 따르고, 날개옷을 입은 여선(女仙)은 하늘을 날며, 남선에게 추파를 던지는 야릇한 장면이었다. 박달은 그 그림을 보면서 자신도 도술을 익혀 신선이 되면 저렇게 아름다운 여선과 어울려 한세상 멋지게 살 수 있다는 상상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화중지병(畵中之餠)이었다. 그 그림에서 본 여선의 모습을 생각하니 한별의 모습과 거의 흡사했다. 박달이 집을 떠나 한양으로 향하기 전에 꾼 꿈을 생각해 냈다.

그 꿈이 너무 생생하여 박달은 죽을 때까지도 그 꿈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박달이 깊은 산속을 홀로 지나다가 그만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곳으로 가고 말았다. 가도 가도 좁은 산길만 나올 뿐이었다.

뒤를 돌아보아도 지나온 길이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앞으로만 갈 수밖에 없던 박달은 겁이 덜컥 났다. 그 자리에 서서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도저히 알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서 있으면 길 양편에서 지네와 지렁이 같은 미물들이 박달에게 달려들고 가까이서 숨 탄 것들의 포효(咆哮)가 들려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을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박달은 더욱 겁에 질려 무조건 앞만 보면서 달리기 시작하였다. 얼마를 달렸는지 모르지만,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전후, 좌우를 보면서 아무리 달려도 똑같은 풍경만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가다 산속에서 지쳐 쓰러져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죽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까지 일었다. 박달이 잠시 서 있으려니 이번에는 불그스름한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리면서 발아래로 불덩이가 떨어졌다. 모골이 송연하여 박달은 오들오들 떨면서 다시 앞을 바라보며 달렸다.

그렇게 서너 식경(食頃)을 더 달려가니 천 길 높이의 산이 우뚝 나타났다. 산 아래 문이 있었다. 산길은 그 산 속으로 통하는 좁은 문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는 차마 무서워 그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없었다.

쇠로 된 육중한 문 앞에 박달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피리 소리가 들리더니 홀연 소를 탄 동자(童子)나 나타났다.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박달은 눈을 씻고 그 동자를 살펴보았다.

“박달 도령님, 이곳까지 오시느라 욕보셨습니다. 저는 문수동자(文殊童子)라고 하옵니다. 지금부터 제가 도령님을 모시겠습니다. 이 소에 오르소서.”

선동(仙童)이 시키는 대로 박달이 소 잔등에 올라타자 선동은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동굴이 나타났다. 동굴 안은 푸른빛이 나면서 끝없이 산길이 뻗어 있었다. 마치 구름이 흘러가는 듯 소는 빠른 속도로 달렸다. 주마등처럼 스치는 풍경이 마치 옥촉(玉燭)처럼 환상적이었다.

박달이 걸어온 것만큼의 긴 길이었으나 소의 걸음이 얼마나 빠르던지 귀에서 바람 소리가 일었다. 그렇게 서너 식경을 달려 어느 집 앞에 도착하였다. 인간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어마어마하게 큰 저택이었다. 박달은 속으로 분명 임금이 사는 대궐이라고 생각하였다.

“어서 오세요. 여기는 신선이 사는 무릉동천입니다. 소녀는 요희(瑤姬)라고 하옵니다.”

날개옷을 입은 절세가인이 박달에게 허리를 굽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박달은 여인을 보고 깜짝 놀라서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그 여인은 다름 아닌 박달이 늘 보아오던 신선도 속의 여인이었다.

여인의 옷차림이며 살포시 웃는 모습, 손에 든 붉은 복숭아, 분명 그림 속의 그 선녀가 틀림없었다. 박달은 허벅지를 꼬집어보고 혀를 깨물어 보았다. 통증이 전해졌다. 틀림없는 사실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박달은 그제야 자신의 염원이 이루어졌다고 판단했다.

자세히 눈을 들어보니 오색구름이 하늘을 날고 청학(靑鶴) 천여 마리가 날며 노래를 불렀다. 시녀들이 비파(琵琶)를 타고 생황(笙篁)을 부니 수백 명의 전라(全裸)의 무희들이 학들과 어울려 허공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요희는 옥고(玉膏)라는 단약을 박달에게 주면서 즉시 복용하라고 했다.

그녀는 그 약을 한 알만 먹어도 몸이 저절로 새털처럼 가벼워지고 하늘을 날 수 있으며, 영혼이 육체를 이탈하여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조화를 부릴 수 있다고 하였다. 요희는 박달의 손을 잡고 주연이 마련된 대청으로 안내하였다.

“그 약은 어머니 서왕모께서 저에게 하사하신 것입니다. 저는, 인간 세상의 도령님을 흠모하고 있었사옵니다. 오늘에서야 도령님을 직접 뵈니 여한이 없습니다. ”

요희의 목소리는 은쟁반 위에서 수정 구슬이 굴러가는 소리 같았다. 인간 세상에서는 들어 볼 수 없는 음성이었다.

'선녀가 인간인 나를?'

박달은 다시 한번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 꿈이 아니었다. 가슴을 쥐어뜯고 혀를 깨물어 보았다. 그녀는 박달의 이상한 행동에 의아해하였다.

“박달 도령님, 선량한 사람들을 위해 복을 많이 지으소서. 또한, 도령님께서 세우신 대의(大義)를 꼭 이루시어 만백성이 편히 살 수 있도록 하소서. 조만간에 옥제(玉帝)께서 도령님 하계(下界)에서의 유배를 풀어 주실 것 같습니다.”

'뭐라? 옥황상제께서 나의 하계 유배를 풀어준다고. 요희가 점점 알 수 없는 말만 하는구나. 도대체 뭐가 어찌 돌아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요희는 말을 마치자 박달에게 절을 하였다. 박달은 고마움의 표시로 그녀를 살며시 안아주었다. 그러자 곁에서 시중을 들던 시녀들이 수줍어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소녀, 도령님이 도착하기 전에 지은 시 한 수가 있사옵니다.”

“오오, 그래요? 한번 듣고 싶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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