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등령 전설 <11> 예정된 인연

요희가 즉석에서 시를 읊었다. 시를 읊는 그녀의 목소리가 얼마나 낭랑하고 고운지 목소리가 금방 옥구슬로 변하여 떨어질 것 같았다. 악사들이 요희가 시를 읊을 때 반주를 넣어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밤안개 물러가 허허로운데

태산에 걸린 가녀린 그믐달만 바라보네

달 속에 옛 정인이 앉아 있지만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술잔만 비우네

 “오오, 절창이오. 내 그대의 심정을 알 것 같소. 이리 오시구려.”

박달이 술병을 들어 요희의 잔에 술을 따르며,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박달은 요희와 수작(酬酌)하면서도 자주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 술이 어느 정도 취했고 기분이 좋아진 박달이 일어섰다.

“이번에는 그대의 시에 화답해야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소녀도 도령님의 마음이 무척 궁금하옵니다.”

요희의 요염한 입술이 붉게 빛나고 그 사이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하얀 치아가 무척 아름다웠다.

 그대는 이미 허공의 난(鸞) 새같이 다정한 짝을 찾았다오

사방에서 미풍이 불어와 장부의 마음 뒤흔드니

어찌 홀로 비단 이불 덮고 베개를 벨 수 있으리오

새벽닭 울고 동창이 여명에 촉촉이 젖을 때까지

동방(洞房)에 오색구름이 일고 감우(甘雨)가 흠뻑 내릴지니

박달이 즉석에서 시를 지어 읊자 요희를 비롯한 시비(侍婢)들은 숨을 죽였다. 사내의 당당하고 활기찬 목소리에 여인들은 중간중간 신음(呻吟)을 토하기도 하고, 탄성을 지르기도 하였다. 박달과 요희가 계속 잔을 주고받으며, 점점 여흥에 빠져들고 있었다.

밤이 깊어가자 보랏빛 이슬비가 소리 없이 내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꽃들이 눈처럼 휘날렸다. 요희의 양 볼은 이미 홍조(紅潮)로 가득했다.

 “소녀, 예전부터 도령님을 뵙고 함께 하고 싶었사옵니다.”

요희가 고개를 더욱 숙이며 부끄러워하였다.

“너무 상심하지 마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바로 이 사람입니다. 그대를 보고 싶으면 비가 되어 그대 가슴을 적실 테니 비가 내리면 피하지 마오.”

요희가 박달의 잔에 술을 따르며 탄식하였다.

“도령님, 남녀의 사이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습니다. 오늘은 서로 좋다 하여 밀어로 상대 가슴에 꽃을 심지만 하룻밤을 자고 나면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기도 하지요. 요즘처럼 서로를 위해주는 마음이 없는 풋사랑은 싫습니다.

제가 저 달 속의 상아(孀娥)가 되어 도령님의 정인(情人)이 되면 어떠할지요? 저는 이제 세상사는 재미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도령님, 아무리 공부가 중요하지만, 곁에 도령님을 사모하는 여인이 있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요희는 비단 손수건으로 살며시 눈가를 닦았다.

“남녀의 정분(情分)은 하늘이 맺어주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계(下界)의 작금의 세태는 이러한 천명(天命)을 헌신짝 취급을 합니다. 사랑과 정을 황금으로 바꾸는 자들은 자신의 가치를 신기루와 바꾸려는 우매한 자들이지요. 갈수록 흉악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연정(戀情)을 돈으로 산 까닭입니다. 그러한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자식들 또한 냉혈한이 되어 세상을 속이려 들겠지요.”

요희는 박달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참사랑을 찾고자 하였으나, 마음과 같지 않사옵니다. 어찌해야 좋을지요?”

요희는 박달의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이 몸이 그대 가슴 속 깊은 곳에 꽃씨를 심어도 되겠소?”

“저의 마음 이미 도령 진인님이 훔쳐 갔사옵니다.”

박달은 시비들을 물리고 요희에게 춤을 부탁했다. 백옥 같은 이마, 붉은 입술, 능수버들처럼 가려린 허리, 술에 취하고 미인에게 취하니 박달은 부러울 것이 없었다. 박달이 요희에게 다가가니 살포시 그녀가 안겨 왔다. 하늘을 날던 청학들이 일제히 큰 소리로 노래하며 두 사람의 만남을 축하하였다. 청학뿐만 아니라 온갖 잡새들도 모여들어 하늘 위아래로 날아오르며, 노래하였다. 어느새 동이 훤히 터오기 시작했다. 박달이 마지막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요희가 박달의 소매를 잡았다.

“도령님, 저의 마음을 훔치고 무정하게 떠나시면, 저는 더는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부디 저와 함께 있어 주셔요. 신방에 비단 금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밤새워 노시느라 피곤하실 겁니다. 어서 안으로 드셔서 합환주를 드셔요. ”

시비(侍婢)들도 일제히 엎드려 주인의 소원을 들어달라며, 박달에게 애원하였다.

“그럼, 내 오늘 하루만 그대의 소원대로 하겠소.”

박달이 요희를 덥석 안고 동방(洞房)에 들어 해가 중천에 있을 때까지 구름이 되고 비가 되니 요희는 천지(天地)를 오르내리며, 열락(悅樂)의 기쁨에 말을 잊지 못하였다. 해가 중천에 오를 때까지 이어진 남흔여열(男欣女悅)의 열기에 저택은 지극한 환락에 휩싸였다.

 '그렇다면 내 꿈에 나타난 선녀 요희가 지금 내 옆에 있는 한별 낭자이며, 한

 별 낭자의 꿈에 나타난 그 남자 신선이 나란 말인가? 아냐, 이건 말도 안 돼. 한낱 상상일 뿐이야. 망상이야. 망상이 분명하다고. 나 역시 이 낭자처럼 귀교(鬼交)의 즐거움을 맛보았을 뿐이야.’

박달이 혼자서 중얼거리자 한별은 박달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도령님, 무엇을 그리 한참 동안 생각하셨어요?”

“응?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오.”

“도령님, 저의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꿈속에서 사랑을 나눴던 임이 실제로 제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이 신기하고 오묘한 일에 저는 지금도 가슴이 떨리고 다리가 후둘 거립니다. 예전에는 몰랐었는데 처음 도령님을 보고 나서 제 가슴이 터질 듯 벌렁거립니다. 이 순간에도 저의 심장은 터질 듯 쿵쾅거리며, 격렬하게 뛰고 있답니다. 이 일을 어찌하여야 할지 안타깝기만 하답니다.”

한별은 가늘게 흐느끼는 것 같았다. 가녀린 그녀의 어깨가 천천히 아래위로 들썩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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