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등령 전설<12> 꿈속의 정인을 확인하다

“나도 언젠가부터 인지 낮잠을 잘 때면 어떤 묘령의 여인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었답니다. 몇 번 그런 꿈을 꾸었는데,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여인이 바로 한별 낭자 그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박달은 그림 속의 여선(女仙)을 그려보았다.

“어머나, 그게 정말이세요?”

“내가 낭자에게 거짓말을 해서 무엇 하게요?”

“그럼, 저와 도령님은 이미 꿈속에서 인연이 맺어진 듯하네요. 저는 이제 어쩌면 좋아요? 처음 뵙는 도령님이 마치 십년지기 같으니. 저의 마음을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정신이 몽롱하고 가슴이 울렁거려 잠시도 안정을 찾을 수 없어요.”

한별은 두 손으로 가슴을 감싸 안으며, 박달의 어깨에 살며시 기댔다.

“한별-.”

박달이 한쪽 팔로 한별을 살며시 안았다.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박달의 품에 안겼다. 박달은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기분이 묘했다. 마치 구름 위에 누워있는 느낌이 들었다.

“한별, 아니 그, 금봉, 그대를 은애하여도 되겠소?”

“남녀 간의 사랑을 누구에게 허락받고 하시나요? 저는 도령님을 처음 뵐 때 이미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이렇게 도령님 품에 안겨있다는 사실이 꿈이 아니길 바랄 뿐이에요. 지금 저의 가슴은 터질 듯 마구 뛰고 있답니다. 이 감정을 어찌 다스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니요. 이건 절대로 꿈이 아니오.”

“그렇죠? 꿈이 아니지요?”

“한별, 이건 절대로 꿈이 아니오."

박달 도령은 두 팔로 한별 아가씨 금봉을 안아주었다. 처녀의 젖가슴이 콩닥거리며 사내의 넓은 가슴에 닿았다. 박달은 고향에 있을 때도 정을 주려고 했던 여인들이 있었지만, 과거를 준비해야 하는 부담으로 그냥 불장난 같은 몇 번의 풋사랑으로 만족해야 했다.

수많은 부류의 사랑 중에서 청춘 남녀의 사랑이 으뜸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이 사라지지 않는 한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에 수반 돼야 하는 남녀의 사랑은 기적이 아니고 무엇일까. 천년 묵은 고목(枯木)에 푸른 잎이 나고 꽃이 피는 일 만큼이나 남녀의 사랑은 신비하고 찬란한 일이다. 그 같은 사랑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기에 세상은 그런대로 살아갈 만하다. 세상만사가 늘 평범한 일만 일어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누구를 사랑하거나 누구에게 사랑을 받는 일은 용기 있고, 대담해야 하며, 미래 지향적인 사람에게 한정된 신의 축복이라 할 수 있다. 악인(惡人)이나 존재감이 없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사랑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설령 일어난다고 하더라고 찰나의 허상(虛像)에 불과하며, 한낮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같다. 선남선녀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덕을 태산처럼 쌓아야 가능하다.

하지만 지순한 사랑이라 하더라도 결론이 아름답지 못한 경우도 인간사에는 허다하게 일어나기도 한다. 평범한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결말이 행복한 경우는 흔하지 않기 때문에 눈물과 탄식이 난무(亂舞)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사랑 만큼은 행복할 것으로 믿으려 한다.

고향에서 과거 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박달의 준수한 외모에 반한 처녀들이 그에게 자주 추파를 던지곤 했었다. 그러나 박달은 과거에 급제하면 대갓집의 꽃 같은 처녀들이 줄을 서서 청혼해 올 것을 꿈꾸면서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욕망을 간신히 억눌러 왔다.

“저는 오늘 밤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왜 이제야 나타나셨는지요? 도령님은 제가 꿈속에서 만났던 선풍도골의 그 헌헌장부님이 틀림없습니다.”

“정말이지요?”

박달은 팔에 힘을 주었다. 한별이 박달의 품에 깊이 안겨 왔다. 박달은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까지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고 도깨비와 산짐승에게 쫓겨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있었던 사실은 까맣게 잊었다.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선녀를 만나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네에. 도령님은 제 꿈에 나타나 저와 부부의 연을 맺었습니다. 수시로 나타나시어 저의 몽중인(夢中人)이 되셨습니다. 그 꿈속의 임이 지금, 이 순간 제 앞에 계십니다."

“나와 그대는 보통 인연이 아니구려.”

박달은 그의 입술로 한별의 촉촉한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산골 처녀의 순정이 달콤한 입술에 잔뜩 묻어 있었다. 한별은 박달의 입맞춤에 저항 없이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녀는 이미 몽중(夢中)에서 여러 차례 정사(情事)를 치른 터라 익숙해 있었다.

“도령님-.”

바싹 마른 연못에서 헐떡이던 잉어가 대우(大雨)를 만난 것처럼 물레방앗간은 순식간에 생기와 열기로 가득 찼다. 운우(雲雨)의 맛을 알고 있는 박달은 한별을 서서히 열락의 늪으로 인도하였다. 박달의 능숙한 솜씨에 한별은 쉽게 닳아 오르며, 격렬하게 반응하였다.

산촌에서 곱게 자란 한별 아가씨 금봉은 사내를 전혀 모르는 숫처녀였다. 한별에게 얼마 전부터 꿈에 옥골의 장부가 나타나면서 그녀는 이성에 관한 관심이 높았다.

밤마다 꿈속에서 이어지는 미지의 사내와의 정사(情事)는 산골 처녀의 이성을 눈뜨게 하였다. 박달이 나타난 시점이 그녀가 꿈속의 사내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 속 깊은 곳에 쌓여 상사의 정한이 최고 절정에 이를 때였다. 그 몽중인을 꿈이 아닌 현실에서 만나고 있다는 사실이 한별은 믿기지 않았다. 박달의 부드러운 손과 뜨거운 입술이 그녀에게 닿을 때마다 한별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끝 모를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계속

저작권자 © 남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