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박인희(1931∼ )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기를 꽂고 산들 무얼 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몸매를 감은
한 마리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얼 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내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르는데······
가슴에 돌단을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단 한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헤어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시감상) 박이문(朴異汶1931∼ ) 본명은 박인희이다. 서울에서 출생했고,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에 건너가 소르본느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여대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톤 시몬즈여대에서 강의하였으며, 귀국 후 포항공대 철학교수를 역임하였다. 1955년 3월 『사상계』에 시 「회화를 잃은 세대」를 발표하고, 1957년 5월 『시와비평』에 평론 「현대시의 메타훠」를 발표함으로써 문필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눈에 덮인 찰스강변』(1979), 『나비의 꿈』(1981), 『보이지 않는 것의 그림자』(1987) 등을 간행하였으며, 『프랑스 낭만주의 시선』(1976)을 번역하기도 했다. 철학‧문학‧미학 등 다양한 주제의 평론집과 수상집을 발간하였다.

“온 밤내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르는데······/ 가슴에 돌단을 쌓고” 못 잊어 밤 새 눈물을 흘리고 마침내 강물이 되어 흐르는데, 가슴에 돌단을 쌓고 잊어야 하다니, 타의에 의해 보지 못하게 되었다면 그 삼삼한 얼굴을 어찌 잊을까? 간절히 보고 싶은 얼굴을 보지 못하고 사는 모순이 결국 삶의 정의인가?

사람이 살다보면 이웃사촌이라 하여 가까워지기도 하고, 친척 간에도 자주 오가지 못하면 멀어지기도 한다. 또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한다. 그런데 친하게 지내던 사람을 미워하고, 잊어야 할 이유 때문에 모른 척 지내야 할 때 그 고통은 애증으로 바뀔 수 있다.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우리는 자기의 얼굴을 선택할 자유가 없다. 마음에 의하여 얼굴형이 틀잡혀진다. 마음의 고상·우아함을 생각하면 그 사람의 얼굴이 자연히 우아하게 된다. 야비한 마음을 가지면 바로 그 사람의 얼굴은 야비하게 된다. 그래서 얼굴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사람의 얼굴은 풍경이다. 한 권의 책이다. 용모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발자크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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