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등령 전설<14> 꿈이 이루어 지다 (중)

“우리는 이미 부부로 맺어질 운명인가 봅니다. 서로 기인한 꿈으로 인연을 맺는다는 일은 기적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저 역시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청춘의 정염(情炎)을 꺼질 줄 모르고 활활 타올랐다. 두 몸이 타고, 물레방앗간도 타고, 천지가 뜨겁게 타올랐다.

“한별, 은애하오.” “도령님-.”이심(二心)이 일심(一心)이 되고, 이체(二體)가 다시 한번 동체(同體)가 되는 일은 순간이었다. 둘과 하나라는 미묘한 차이는 세상을 만들고, 세상을 존재케 하는 묘법(妙法)이기도 하였다.

삼천대천의 만상은 바로 이 묘법의 지극한 어울림에서 비롯되었고 그 묘법에 따라 사라지게 마련이다. 순간의 합일이 영원으로 치닫고 영원은 다시 순환되어 찰나로 귀결되기도 한다. 대저, 이 현묘지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객체가 어디 있을까.

두 사람은 수년 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익숙해 있었다. 매 순간이 청실과 홍실로 연결되어 영원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한바탕 휘몰아친 격랑의 파고(波高)가 가라앉고 허무한 고요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박달은 부동의 자세로 한별을 부둥켜안고 무언(無言)의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한별이 정신을 가다듬고 옷매무새를 고쳤다. 두 사람이 물레방앗간을 나왔을 때 사방은 어두컴컴해 사방을 분간할 수 없었다. 한별이 앞장서서 부자연스럽게 걷고 박달이 두리번거리며 뒤를 따랐다.

행여나 마을 사람들의 눈에 띄면 삽시간에 이상한 소문이 퍼져 한별이 곤란한 지경에 빠질 수 있었다. 한별은 사방이 어두워 일단 안심하였다. 벌말은 고요했다. 한별은 집으로 향하면서 부모님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무슨 말로 변명해야 할 지 고민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물으시면 뭐라고 하지?’ “한별, 무슨 걱정을 하는 거요?” “다 큰 여식이 새벽이 되도록 집에 안 들어오니 아버지, 어머니께서 크게 걱정하시고 계실 거에요.”

한별은 말끝을 흐렸다.“걱정하지 마오. 내가 어르신께 마을 구경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만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할게요.” “고맙습니다.”

박달은 한별을 안심시켰다. 두 사람의 검은 그림자가 마을에 들어서자 개들이 짖기 시작하였다. 한 마리가 짖으니, 여기저기서 개들이 경쟁하듯 짖어 댔다. 다행히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한별이 집에 도착하여 대문을 살짝 건드리니 ‘삑’ 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렸다. 다행히 빗장이 잠겨있지 않았다.

“도령님, 어서 들어오셔요. 아버님이 대문 빗장을 잠그지 않으셨어요.” 안방은 불이 꺼져 있었고, 한별의 방과 그 옆으로 진이 방에 호롱불이 켜져 있어 흐릿하게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한별, 잘 자요.”“도령님도요." 한별이 부모가 잠들어 있는 안방을 살피며, 살금살금 자신의 방을 향하여 다가가는데 다리가 후둘 거렸다.“금봉이니?”

한별이 거의 방에 다다랐을 때 굵직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적막을 깼다. 화들짝 놀란 한별은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하였다. 그 목소리가 천둥 치는 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다. 한별은 가슴을 진정시키고 거의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대답하였다.

“네-, 아버지.”“밤이 늦었다. 어서 자거라.”“네에-.”한별은 잠자리에 들었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물레방앗간에서 박달이 속삭이던 달콤한 소리가 귀가에 맴돌고 첫 정사의 희열이 가시지 않고 지속하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누워서 오늘 밤에 일어났던 일들은 처음부터 다시 되짚어 보았다.

‘박달 도령님이 내 앞에 나타나신 일은 천지신명님이 도우신 거야. 안 그러면 풍산 고을에 사시는 도령님이 어떻게 내 앞에 나타나실 수 있을까. 그리고 그동안 늘 꿈속에서만 몽중인과 사랑을 나누었는데, 오늘 실제로 그분과 사랑을 나눠보니 너무 황홀했어.

어른들은 남녀가 일심동체가 되는 일이 무척 고통이 뒤따른다고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어. 아직도 내가 도령님 품에 안겨있는 기분이야. 가슴이 뛰고 얼굴이 화끈거려서 도저히 잠도 이룰 수 없어. 이 기분을 어떻게 해야 영원히 간직할 수 있을까. 그런데 도령님이 내일이라도 떠난다면 나는 어떻게 하나?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를 던져 놓고 홀연히 떠나가면 나는 이제 어떻게 살란 말인가. 벌써 도령님이 떠나간 뒤가 두려워.’

한별은 밤새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뒤척이다가 날이 밝을 무렵 잠깐 눈을 붙였다. 부엌에서 어머니가 아침을 짓는 소리에 그만 잠에서 깬 그녀는 얼른 부엌으로 나갔다. 어머니 봉양댁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아 한별은 어머니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모녀는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어젯밤에는 왜 그리 늦었니?”봉양댁이 침묵을 깼다.“도령님에게 마을 구경시켜드리고 이런저런 이야기 하다 밤이 깊은 줄도 몰랐어요. 죄송해요.”“밤에 처녀가 생면부지 과객과 어울려 다니는 일은 좋지 못해. 행여나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니. 이 마을 사람들은 입이 가벼워서 한번 이상한 소문이 나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간다. 특히 너처럼 혼기가 꽉 찬 처녀들은 몸조심, 말조심, 밤길 조심해야 해.”

“알았어요. 조심할게요.” 봉양댁은 딸 한별이 인물이 곱고 마음씨가 어려 늘 딸의 행동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박달은 해가 거의 중천에 있을 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별의 부모는 아침 일찍 집을 비워 한별 아가씨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잔일을 해야 했다. 박달이 눈을 비비며 사랑채 문을 열고 나오자, 벌써 그가 일어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듯 한별이 화사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사랑채 툇마루에 세숫대야가 놓여 있었다. 한별은 첫날밤을 치른 새색시 같았다. 녹색 저고리에 붉은색 치마를 입고 배시시 웃는 그녀의 모습에 박달은 눈이 번쩍 뜨였다. 간밤에 희미한 달빛에 보았던 모습이 아니었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백합보다 더 아름다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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