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록체에 대한 기억
이경주

숲을 떠난 푸른빛의 기억이 갇힌 방으로 들어간다

형광등 불에 달궈진 자갈과 모래알들이 바닥에 깔리어

전갈이 지나는 길을 만들고 있다

마른 바람이 눈에 익거나 때로는 낯선 발자국들을 지우는 한낮에는

미세한 먹이사슬들이 잠깐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하얗다

종일 내리쬐는 빛은 벽에 박힌 나무들의 뿌리와

그걸 바라보는 죽은 새들의 밥상과

좁은 틈새를 뚫고 머리를 든 작은 벌레들의

핏줄까지 하얗게 만든다

한번이라도 불빛에 닿은 것들은 제 본래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오후가 저물 때면 변색의 관성은 더욱 강해져

누구도 아침을 기억하지 못한다

방의 움직임이 멈출 때까지 나갈 수 없다

아무렇게 발을 들여 놓았다가

깊은 사막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폭풍에 갇히어 돌아설 수 없다

여전히 문은 굳게 닫혀 있고

표정이라고는 창백한 빛뿐인 고요한 방이

암흑 속을 빠르게 날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이상하다 분명 하루가 지난 거 같은데

눈을 뜨면 다시 그 자리에 와 있고

녹색이 사라진 방으로 계속 나비들이 날아 들어온다


2022년 경남일보신춘문예에 당선작인 이 시를 읽으니 재작년에 태어난 손녀가 보인다. 물컹한 덩어리처럼 만질 수도 없을 정도로 여린 존재이었는데 하루하루 기고 앉고 일어나고 걷고 뛰는 것이, 옹알이에서 말귀 다 알아듣는 것이 완전한 사람의 모습을 갖추었다.

마치 어린 나무씨앗이 움을 터서 나뭇가지를 세우고 햇빛과 물을 먹고 새순과 꽃을 피우는 현상과 같다. 이렇게 수 백년을 사는 나무처럼 승승장구만 하면 좋을 것인데 백년도 못사는 인간은 어느새 엽록체葉綠體가 말을 안 듣는다.

명반응과 암반응이 격렬히 일어나 광합성을 해야 하는데 말이다. 매일 똑같은 방안에서 표정이 창백한 나는 이제 낙엽이 된 것은 아닌지, 빛은 저렇게 뜨거운데 내안에 엽록소는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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