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등령 전설<16> 금봉, 치성을 드리다.

“도령님, 저는 이대로 영원히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어요. 영원히…….”

사내의 거칠면서 부드러운 율동이 방안을 금방 열락의 도가니로 변하게 하였다. 간밤의 첫 정사에서 비록 금봉은 희열을 느끼지는 못하였지만, 잔잔한 기쁨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성스러운 두 사람의 몸짓이 은밀하게 이루어지면서 서로의 진실한 믿음과 신뢰를 쌓아갔다. 박달이 용암을 토해내자 금봉은 그 불덩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 용암이 너무나 뜨거워 두 나신(裸身)은 동시에 활활 타오르면서 열락으로 이르는 길로 접어들었다. 여운이 길게 이어 졌다.

“도령님, 혹시 고향에 처자식이 있는 건 아니신지요? 그냥 노파심에서 여쭤보았습니다. 너무 개의치마세요.”

“아니? 미장가인 나에게 어찌 처자식이 있을 수 있단 말이오? 아무 염려 하지 마오. 내 장원 급제하면 제일 먼저 그대에게 달려올 것 이오.”

“도령님, 정말로 고마워요. 가슴이 터질 듯 벅차오릅니다.”

“금봉이, 사랑하오.”

박달이 다시 금봉의 입술을 지그시 누르자 금방 달아오른 금봉은 박달도령의 몸짓에 부드럽게 응해주었다. 두 사람의 은밀한 행동은 마치 오랫동안 부부로 살아온 사이 같았다.

“도령님-.”

이제 막 사랑에 눈을 뜨기 시작한 남녀는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동안 열락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멀리서 꿩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달은 감기 기운이 있다는 그럴 듯한 핑계를 대고 며칠 더 머물기로 마음먹었다. 금봉의 부모가 들녘으로 나가고 나면 두 사람은 붙어서 지내다 시피했다. 금봉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농사일에 바빠서 두 사람 사이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이웃집 아낙들은 점점 이상한 시선으로 금봉이네를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개똥어멈, 소문 들었수?”

“뭔 소문?”

“금봉이네 집에 과객이 한 사람 들었는데 키고 크고 인물도 출중하다고 하는데 아마 과거를 보러가는 유생이라고 하지?”

“그래?”

“그런데, 낮에는 어른들 들에 나가고 없는데 이상 없을까?”

“이상이라니?”

“이 여편네야, 한창 나이 남녀가 붙어있으면 무슨 사달이 나도 날거아녀?”

“금봉이는 몸가짐이 조신한 애인데 설마 그럴 리가?”

동네 아낙들은 금봉이네 집을 바라보며 입방아를 찧어댔다. 소문은 금방 입에서 입을 타고 동네에 퍼지게 되었다. 박달이 아름다운 산골처녀 금봉이에게 잠시 미혹되어 마음을 빼앗겼다 해도 과거를 보러가는 입장이어서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녀의 지극한 간호로 다친 부위도 어느 정도 나아 이제는 걷는데 큰 불편이 없었다. 박달은 다급해진 마음에 식사를 마치면 사랑채에 앉아 책을 읽곤 했다.

 

子曰(자왈) 巧言令色(교언영색) 鮮矣仁(선의인). 曾子曰(증자왈)

吾日三省吾身(오일삼성오신) 爲人謀(위인모) 而不忠乎(이불충호)

與朋友交(여붕우교) 而不信乎(여불신호) 傳不翌乎(전불익호)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교묘하게 꾸민 말과 보기 좋게 꾸민 얼굴빛에는 어진 마음이 드물다. 증자가라사대 말하길 나는 내 자신을 매일 세 번씩 반성한다. 남을 위해서 일을 하는데 정성을 다 하였든가, 벗들과 함께 서로 사귀는데 신의를 다하였든가, 전수 받은 가르침을 반복하여 익혔든가.

 

사랑채 툇마루에 앉아 몰래 박달이 낭랑하게 책 읽는 소리를 들으며 금봉은 공상에 빠져있었다. 박달이 과거에서 장원급제하여 머리에 어사화 꽂은 사모(紗帽)를 쓰고 찾아오는 아름다운 상상을 하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박달이 집에 기거하면서부터 금봉은 꿈과 현실을 구별하기 힘들었다. 현실의 임이 꿈속의 임이 틀림없으니 누구라도 그녀의 입장이 되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도령님은 꼭 장원급제하실 거야. 그리되면 나는 이 산촌을 떠나 도령님을 따라 한양에 가서 살아야지.’

박달이 집에 머물면서 금봉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 금봉은 아버지가 불러도 어떤 때는 듣지 못하고 공상에 빠져 먼 하늘만 바라보곤 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그런 금봉이가 박달에게 마음을 빼앗겼다고 입방아를 찧었다. 그러나 금봉은 동네 사람들의 입방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박달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자신의 집에 있는 동안 정성을 다하여 뒷바라지 하였다. 금봉은 박달의 장원급제를 위하여 천지신명께 빌어보기로 마음먹고 장독대에 정화수를 올려놓고 빌었다.

“천지신명님, 박달 도령님이 꼭 장원 급제하도록 도와주세요.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님, 박달 도령님이 꼭 장원급제해야 이 소녀가 잘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빌고 비나이다. 박달 도령님이 장원급제하여 어사화를 꽂은 사모(紗帽)를 쓰시고 소녀에게 달려 올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소녀의 소원을 들어주소서. 이렇게 비나이다. 비나이다.”

금봉은 손바닥 손금이 지워질 정도로 박달의 장원급제를 위하여 빌고 또 빌었다. 다음 날 아침 박달이 뒷간에 가기위해 뒤꼍으로 가다가 금봉이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올려놓고 치성드리는 모습을 보고 살며시 다가갔다. 자신의 장원급제를 위하여 천지신명에 빌고 있는 금봉이의 모습에 박달은 그만 코끝이 찡해지면서 가슴 한편에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울컥하며 치밀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금봉이 나의 금의환향을 위하여 빌고 있구나. 너무나 갸륵하고 고마운지고. 꼭 장원급제하여 낭자의 정성에 보답해야하는데. 꼭 장원급제해서…….’

박달의 눈가에 그만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더 이상 그 자리에 서있을 수가 없어서 살며시 뒷걸음질로 빠져나왔다.

“천지신명님이시, 이 소녀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소서. 우리 박달 도령님이 이번 과거에서 장원급제하도록 굽어 살피소서. 이 소녀 이렇게 빌고 비나이다.”

박달은 자신을 위하여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는 금봉의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려 견딜 수 없었다. 살며시 다가가 안아주고 싶었지만 자신의 장원급제를 위하여 기도하는 금봉의 치성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박달은 고향에서 자식의 금의환향을 위하여 가슴 졸이고 있을 늙은 어머니 생각에 그만 마음이 울적했다.

없는 살림에 자식을 제대로 된 사람으로 만들어 보겠다고 박달 도령의 노모(老母)는 불철주야 농사일에 매달리면서 박달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있었다. 아들이 큰 소리로 책 읽는 소리를 들으면서 박달의 노모는 육신의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런 노모가 박달이 어느 산촌에서 산골 처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한양 가는 길을 지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억장이 무너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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