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박달의 은인들

 '어서 여기를 떠나 한양으로 가야하는데…….'

박달은 마음이 조급해 지기 시작했다. 예정대로라면 지금 쯤 한양에 도착하여 과거준비에 몰두해 있어야 했다. 아직 날짜가 남아 있어 그런대로 여유는 있지만 평동 벌말에 발이 묶인 박달은 답답했다. 금봉은 저녁을 일찍 준비하여 박달에게 차려주었다. 부모가 들녘에서 오기도 전에 저녁을 차려주고 열심히 공부하란 의미였다. 들에서 늦게 귀가하는 아버지와 겸상을 하게 되면 박달이 너무 시장할 것도 같았다.

“같이 들어요.”

“도령님 먼저 드세요. 저는 나중에 들게요.”

“아직 어르신이 들에서 안 들어오셨는데 내가 먼저 들어도 되는 가요?”

“아버님께서 도령님이 먼저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차려드리라고 하셨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드세요. 저는 나중에 들게요.”

금봉이 상을 들이고 나가려고 하자 박달이 손을 살며시 잡았다.

“고맙구려. 생면부지인 나에게 이렇게 잘해주니 내 몸 둘 바를 모르겠소.”

수저를 들고 있던 박달은 콧날이 찡해 밥을 먹을 수 없었다.

“저희 집에 계시는 동안 아무 염려하지 마시고 공부만 열심히 하세요.”

“고마워요. 이 은혜는 꼭 보답하리다.”

금봉의 손에서 보드라운 감촉이 전해졌다. 과거를 준비하는 입장에서 여색(女色)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금기시 되어 있지만 금봉만은 예외로 하고 싶었다.

“도령님, 많이 드셔요. 밥과 찬은 얼마든지 있어요.”

금봉이 손을 빼며 어색해 했다. 저녁 식사를 마친 박달은 책을 읽다가 바람을 쐬겠다며 물레방앗간이 있는 쪽으로 갔다. 박달은 금봉에게 부모님이 들녘에서 돌아오면 저녁을 차려 드리고 나오라고 하였다. 콩이며 볏 집단을 지게에 지고 들에서 집으로 오는 동네 사람들이 박달과 마주치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박달의 뒤를 한참 동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심심산천에 말끔한 선비차림의 젊고 훤칠한 남자가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어색한 장면은 여러 사람에게 자주 목격되었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이면 웅성거렸다.

“저 사람이 금봉이네 집에 묵고 있는 서생이래. 과거보러 가다가 다리도 다치고 몸도 안 좋아 잠시 머물고 있다지?”

“어머나! 얼굴도 보통 잘생긴 게 아니데. 그러다 금봉이하고 눈이라도 맞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되면 금봉이 아버지는 훤칠한 사윗감을 보는 거지 뭐?”

“그럼. 그 동안 금봉이 뒤만 쫓아다니던 갑돌이와 수돌이는 닭 쫓던 강아지 신세가 되네 그려.”

“누가 알아? 벌써 금봉이와 배꼽을 맞추었을지…….”

“하긴, 고것이 꽤나 눈이 높다지?”

“눈이 높으니 산골 머슴 같은 수돌이와 갑돌이가 금봉이 눈에 차겠어?”

“그런데 저 도령 너무 잘생겼어. 내가 말이라도 걸어볼까? 우리 언년이도 혼기가 꽉 찼는데…….”

“아이고! 쇠똥 어멈도 주책이유.”

작은 산촌에서는 박달이 큰 관심사였다. 박달의 풍채가 산촌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준수하고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는 총각이라는 점이 더욱 동네 처녀들과 아낙들 관심을 끌었다. 금봉이 들녘에 나갔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오자 저녁상을 준비하여 방으로 들였다. 며칠 사이에 딸애의 얼굴이 복사꽃보다 화사하게 핀 것 같아 금봉의 어머니는 기분이 좋았지만 왠지 불안했다. 딸 얼굴에 웃음이 가시지 않는 것은 박달이 자신의 집에 묵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녀는 짐작하고 있었다. 저녁을 들다말고 금봉의 어머니는 남편에게 걱정스레 말을 건넸다.

“금봉 아버지, 박달 도령은 언제 떠난 대요?”

“글쎄, 몸이 좋아지면 떠나겠지.”

“당신은 걱정도 안 되우? 다 큰 딸이 집 안에 있는데. 낮에 집에 둘만 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쩌우?”

“어허, 일은 무슨 일? 금봉이가 어린애도 아니고 박달 도령은 과거준비에 여념이 없을 터인데, 무슨 일이 일어난단 말이여?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밥이나 먹읍시다.”

최대호는 아내의 말에 시큰둥한 얼굴이지만 은근히 신경 쓰고 있었다.

“그 도령은 곧 떠날 사람입니다. 딸을 둔 어미로서 걱정이 되어 그러우.”

금봉의 어머니는 다시 한 번 남편에게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그 사람 참! 별 걱정을 다하고 있네그려.”

최대호는 당연히 젊은 남녀가 같이 있으면 무슨 탈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체 하는 것 같았다. 금봉의 어머니도 더 이상 박달과 딸에 대하여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곧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갈 사람이 산골 처녀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금봉의 어머니는 박달이 어서 빨리 몸이 쾌차하여 한양으로 떠나기를 바랐다.

“어머니, 봉희네 집에 좀 다녀올게요.”

저녁 설거지를 마친 금봉은 어머니 눈치를 살폈다. 지금까지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해본 적 없는 착하고 순진한 산골 처녀, 금봉이였다. 금봉은 가슴 졸이며 어머니의 승낙을 기다렸다.

“늦게까지 있지 말고 일찍 들어오너라. 그리고 금봉아, 이거 내일 박달 도령에게 달여 드리거라.”

아내대신 최대호가 딸의 외출을 승낙하며 금봉에게 흰 종이에 싼 것을 건넸다. 작은 봉투 여러 개가 새끼줄로 묶여 있는 것으로 보아 보통 물건이 아닌 것 같았다.

“아버지, 이게 뭔데요?”

“응, 보약이다. 박도령이 얼른 몸이 호전돼야 과거를 보러가지.”

아버지의 박달에 대한 각별한 정성에 그만 금봉은 가슴이 뭉클했다. 지금까지 가족이 아닌 사람을 위하여 보약을 지어 온 적이 없는 아버지였다. 금봉은 자신 보다 더 박달을 마음에 두고 있는 아버지가 고마웠다.

“고마워요. 아버지.”

'고맙다고? 아니 저 얘가…….'

금봉의 어머니는 딸의 말에 의아하면서 자꾸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딸의 언행으로 보아 뭔가 일어나고 있다는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금봉의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부녀의 눈치를 살폈다.

“얘야, 박달 도령은 어디 가셨니?”

금봉의 아버지는 박달이 묵고 있는 사랑채를 바라보며 금봉에게 물었다.

“저녁 드시고 나서 답답하다고 잠시 바람 좀 쐬고 오신다고 나가셨어요.”

“그으래? 이런 산골에 있으니 답답하기도 하고 마음도 울적할 테지. 과거 볼 날은 점점 다가오는데 아직 여기 머물러 있으니 답답할 게야. 금봉아, 네가 그 도령이 우리 집에 잠시 있는 동안이라도 잘 해드리거라.”

금봉의 아버지는 마치 박달이 사위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였다. 금봉은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는 것에 안도하면서 속으로 마뜩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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