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물레방앗간의 역사

“아니, 당신도 참. 지금처럼 해주면 되었지 어떻게 더 잘해 주란 말이에요?”

금봉의 어머니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금봉의 부모는 금봉이 비록 무남동녀 이지만 산촌에서 보기 드물게 고운 여식이 산골에서 나이만 먹어가는 것이 안타까웠다. 어쩌다 동네에 대처에서 놀러오거나 마을에 친척집을 찾는 총각이 있으면 관심 있게 살펴 보았다가 마음에 들면 그 총각의 신상에 대하여 꼬치꼬치 묻곤 하였다.

점점 혼기가 차가는 딸에 대하여 금봉의 아버지가 더 적극적이었다. 그는 수돌이와 갑돌이는 딸의 배필이 될 만한 사내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근동(近洞)을 다니며 사윗감을 찾던 중이었다. 근동이라고 해봐야 가까운 마을인데 마을마다 총각을 모두 찾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근동으로 마실 나갈 때면 슬며시 자신의 딸을 자랑하면서 그 동네에 쓸 만한 총각이 있으면 이런저런 것을 알아보곤 했다.

그러한 최대호에게 박달의 출현은 그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훤칠하고 점잖은 풍채, 과거에 합격하면 벼슬을 할 박달이 사윗감으로는 그만이었지만 곧 한양으로 떠날 사람이라 은근히 애를 태웠다. 자신의 집에 있어야 사나흘이면 떠날 것이기에 금봉의 아버지는 박달이 더 눌러 있기를 바랐다. 사람의 인연이란 것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최대호는 혹시라도 박달과 딸이 짝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기도 했다.

그런 기대를 늘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최대호는 젊은 과객이 하룻밤 묵기를 청하면 기꺼이 맞아들였고 그 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행여 자신의 딸과 인연이 될 수 있을까를 살펴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많은 과객이 자신의 집에 묵어 간적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박달처럼 그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은 사람은 없었다. 금봉은 물레방앗간으로 향했다. 집에서 약간 떨어진 물레방앗간까지 가는 길에 지게를 메고 들에서 돌아오는 수돌이를 만났다. 지게에 볏가마니를 짊어지고 헉헉거리며 오는 수돌이가 안돼 보이기도 하였다.

“어, 금봉아, 어디 가니? 밤이 늦었는데…….”

“…….”

“참, 너희 집에 과객이 묵고 있다면서? 그게 정말이니?”

“네가 알거 없어. 그 분은 먼 친척이야. 곧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시는 분인데 몸이 안 좋아 잠시 머물고 있을 뿐이야.”

금봉은 수돌이에게 톡 쏘아 붙이며 자리를 떴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수돌이었다. 둘 사이에 아무 스스럼없이 자라온 탓에 오누이처럼 지냈지만 이성을 알게 될 나이가 되면서 둘은 서먹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점점 커가면서 수돌이는 금봉을 자주 볼 수 없어 늘 애를 태웠다. 행여 한 동네에 비슷한 나이 또래인 갑돌이에게 금봉을 빼앗길까 전전긍긍하며 그녀를 보면 달려가 말을 붙여보았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쌀쌀맞게 대했다.

‘먼 친척?’

수돌이가 지게를 지고 집으로 향하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금봉이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갑돌이와 눈이라도 맞으면 큰일이었다. 갑돌이와 수돌이는 친한 친구였지만 금봉을 사이에 두고 보이지 않는 사랑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경쟁자였다. 겉으로는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수돌이와 갑돌이가 숙명적인 연적(戀敵)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설마. 금봉이가 이 밤에 갑돌이 녀석을 만나러 가는 건 아니겠지?’

“그런데 어디를 가는 거니?”

수돌이가 뒤 돌아서면서 금봉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네가 알거 없잖니. 내가 어딜 가든지.”

금봉이 새침하게 대답하자 수돌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박달이 꿈속에 나타나기 전에 금봉은 갑돌이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런 금봉의 마음이 박달을 보는 순간 갑돌이에게서 멀어지고 말았다.

“그건 그렇지만 밤에 다 큰 처녀가 혼자 다니는 건 위험해. 요즘 산짐승이 부쩍 마을 근처에 나타나곤 하니까 조심해.”

‘흥 별걸 다 걱정하네.’

금봉이 휑하니 돌아서서 뛰다시피 하며 물레방앗간으로 향했다.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금봉이 논두렁을 건너자 이번에는 소를 몰고 지게를 지고 들에서 돌아오는 갑돌이를 만났다. 금봉이를 오랜만에 만난 갑돌이는 지게를 내려놓고 금봉에게 말을 걸어왔다. 금봉이도 갑돌이가 자신에게 큰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금봉아, 어디 가니 이 밤에?”

“응, 갑돌이구나. 잠시 일이 있어서 나왔어.”

갑돌이는 수돌이와 마찬가지로 동네에서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금봉이와는 막역한 사이였다. 농사가 많은 금봉이네 일을 마치 자기 집 일처럼 거들어주기도 하여 금봉이 부모에게 호감을 얻고 있었다. 그런 갑돌이를 금봉이도 싫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의 눈에는 박달이 외에는 그 누구도 들어오지 않았다.

“너희 집에 과객이 머물고 있다며? 그 과객이 얼마나 더 있을 거니?”

“몰라.”

“몰라?”

“그 분은 다리를 심하게 다치셨어. 몸 상태도 안 좋고 아마 며칠간 머무를 것 같아.”

금봉은 무슨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땅바닥만 바라보았다.

“며칠 머문다고? 금봉아, 내가 너를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알지? 너 혹시 그 사람에게 정을 주거나 마음을 빼앗기면 안 된다. 알았니? 그 사람은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갈 사람이야. 떠나면 그만이야. 뜨내기 같은 그 사람에게 정을 준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야. 잠시 머물다갈 사람이라고. 다시는 찾아 올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 절대로 마음 주면 안 돼. 알았니?”

갑돌이는 마치 오빠가 여동생에게 훈계하는 조로 타이르듯 말하였지만 금봉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너희들이 뭔데 내 일에 간섭을 하는 거니?’

금봉은 목까지 올라오는 말을 억지로 참았다. 갑돌이 오라버니라도 되는 것처럼 점잖게 타이르는 태도에 화가 났다. 아무리 동네에서 스스럼없이 지내는 사이라고하지만 개인적인 일들까지 들먹거리는 처사가 약간은 아니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밤에 어디를 가는 거야? 다 큰 처녀가?”

“응, 갈 데가 있어서. 걱정해줘서 고마워. 갑돌아, 그럼 나 가볼게. 시장할 텐데 어서 집에 가서 저녁 들어야지.”

금봉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박달이 기다리다 지쳐 돌아오는 게 아닐까 걱정하였다.

“아무튼 밤길 조심해. 요즘 산짐승들이 부쩍 마을 주변에 출몰하니까.”

금봉은 물레방앗간으로 향했다. 아직 달이 나오지 않은 탓에 사방이 어두워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금봉이 물레방앗간을 향하여 부리나케 걷고 있을 때 그녀와 일정한 간격을 두고 검은 물체 하나가 뒤 따르고 있었다. 검은 물체는 혹시 앞서가는 금봉이에게 들킬까봐 발자국 소리까지 죽여 가며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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