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다보
송하담

아버지는 목수였다

팔뚝의 물관이 부풀어 오를 때마다 나무는 해저를 걷던 뿌리를 생각했다. 말수 적은 아버지가 나무에 박히고 있었다.

나무와 나는

수많은 못질의 향방을 읽는다

콘크리트에 박히는 못의 환희를 떠올리면 불의 나라가 근처였다. 쇠못은 고달픈 공성의 날들. 당신의 여정을 기억한다. 아버지 못은 나무못. 나무의 빈곳을 나무로 채우는 일은 어린 내게 시시해 보였다. 뭉툭한 모서리가 버려진 나무들을 데려와 숲이 되었다. 당신은 나무의 깊은 풍경으로 걸어갔다. 내 콧수염이 무성해질 때까지 숲도 그렇게 무성해졌다. 누군가의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박히는 게 아니라 채우는 것. 빈 곳은 신의 거처였고 나의 씨앗이었다.

그는 한 손만으로 신을 옮기는 사람

나무는 노동을 노동이라 부르지 않는다. 당신에겐 노동은 어려운 말. 그의 일은 산책처럼 낮은 곳의 이야기였다. 숲과 숲 사이 빈 곳을 채우기 위해 걷고 걸었다.

신은 죽어 나무에 깃들고

아버지는 죽어 신이 되었다

나무가 햇살을 키우고

나는 매일 신의 술어를 읽는다

목어처럼 해저를 걷는다

‘못은 나무에 박히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것, 보이지 않는 벽에 詩라는 못을 박을 것’이라는 시인의 반짝이는 해석이 눈에 띈다. 어떤 부류이든 창작 작품이 아름답고 귀한 것은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작가의 새로운 관찰과 재해석 때문이다.

나무는 죽어서도 목재가 되고 나무못으로까지 사용되는 것처럼 아버지는 죽어서도 죽지 않고 신이 되어 시인의 정신적 씨앗으로 살아있다. 나무못 하나로 고정되어 단단해지는 건물의 완성처럼 아버지의 추억을 통해서 삶의 완성을 향하여 정진하겠다는 시인의 마음도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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