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월하노인(상)

“도령님, 소녀와 도령님의 인연은 분명히 있는 것이지요? 전생에서부터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런 인연이 분명히 있었던 거죠?”

“저 하늘에서 휘영청 밝은 빛을 내며 이곳을 비춰주고 있는 저 달님이 우리 사이를 맺어준 죽매인이랍니다.”

“달님이요? 달님이 어떻게 소녀와 도령님을 이어 주셨단 말씀인가요?”

“그럼, 월하노인(月下老人)이란 이야기를 들려 줄 테니 한번 들어봐요.”

옛날중국 당나라 시절 위고(魏固)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다. 그는 하루바삐 아내를 맞이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어느 날 위고가 여행을 떠났다. 그는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청하라는 마을에 도착하여 송성 남문밖에 있는 여관에 투숙하였다. 그런데 거기서 어떤 사람이 여자 하나를 중매해 주겠다고 말하였다. 상대는 번(藩) 집안의 딸로서 잘 어울릴 것이니 만일 마음에 있으면 내일 새벽 용흥사라는 절 앞에서 맞선을 보자고 했다. 좋은 집안의 아름다운 아가씨와 인연을 맺을 지도 모른다는 설렘에 그는 밤잠을 설쳤다.

다음날 새벽 위고는 단정한 복장으로 약속 장소에 나갔다. 아직 어두운 하늘에는 조각달이 걸려 있었고 주위는 이슬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가 막 용흥사 앞에 도착하였을 때 웬 노인을 발견하였다. 위고는 이 새벽에 누굴까 하고 가까이 접근해 보니 절 계단에는 웬 노인이 달빛에 책을 읽고 있었다. 노인 옆에는 조그만 자루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러한 시각에 노인네가 도대체 무엇을 읽고 있단 말인가? 위고는 어깨 너머로 훔쳐보았으나 무슨 책인지 알 수 없었다. 위고도 남 못지않게 배웠는데 노인이 읽는 책의 글자조차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노인장, 이것은 무슨 책인지요? 그런 글자는 본적이 없는데요.”

그러자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였다.

“이것은 자네가 읽을 수 있는 종류의 책이 아닐세. 천계(天界)의 책일세.”

“그렇다면 노인장께서는 신선인가요. 이런 곳에서 무얼 하고 계신지요?”

“인간세상의 일을 보고 있는데, 주로 밤에 사바세상의 일을 보고 있다네.”

“어떤 일인데요?”

“혼인에 관한 것이지.”

“혼인이요?”

위고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선을 보기로 한 처녀가 자신의 배필로 적당한지 알고 싶었다.

“아이고, 반갑습니다. 어르신이 바로 제가 만나 뵙고 싶었던 분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혼인을 하기 위하여 이리저리 뛰어 보았지만 적당한 상대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실은 제가 여기에 온 것도 신붓감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처녀 번씨 집안의 딸로서 무척 아름답고 착한 처녀라고 하는데 저하고 천생연분인가요?”

“자네 이름과 생년월일 그리고 집 주소를 알려주시게.”

위고가 대답하자 노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위고에게 말하였다.

“참으로 안 된 일이지만 자네하고는 인연이 없군. 모든 혼인은 하늘이 정하는 거야. 그것이 모두 이 책에 기록되어 있어. 자네 배필 될 사람은 지금 세 살이야. 그 아이가 열일곱이 될 때 자네의 아내가 될 걸세. 걱정하지 말 게.”

“세 살이요?”

위고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노인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앞으로도 십사 년을 혼자 지내야 한단 말입니까?”

“그러네.”

“그렇다면 번씨 집안의 딸과 혼인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그러네.”

위고는 망설였다. 그러다가 노인 곁에 있는 자루가 궁금했다.

“그런데 저 자루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붉은 명주실일세.”

노인의 음성은 자못 위엄이 서려 있었다.

“이것이 내가 하는 일이네. 여자든 남자든 태어날 때 혼인 상대가 정해진다네. 나는 밤중에 돌아다니며 남녀의 발을 묶어 주지. 일단 묶여지면 어떤 일이 있어도 헤어질 수 없네. 어떤 사람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부잣집에서 태어날지도 모르며 또 수 천리 떨어져 있을지 모르고 혹은 두 집이 원수지간인 집도 있겠지만 결국은 부부가 되는 결말을 맺는 것이네. 그 숙명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네.”

“그러면 저의 발에도 이미…….”

“그렇다네. 자네 발도 이미 묶여있지.”

“그러면 제 아내가 될 세 살 난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시장에서 야채를 팔고 있는 아주머니의 딸이지. 여기서 멀지 않네. 아주머니는 매일 아침 시장에 나오네. 날이 밝으면 나랑 같이 시장에 가세. 내가 가르쳐 주겠네.”

노인은 자신 있게 말하였다. 서서히 날이 밝고 있었다. 그러나 어제 위고에게 번 씨 집안 처녀를 소개해 주겠다고 약속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남자를 기다려도 소용없을 걸세.”

노인이 위고에게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건 정말 이상한 하늘의 도리야. 남자도 여자도 각자 자기 집에서 크지만 서로가 상대를 모르고 지나는 일이 많지. 그러나 한 가닥 명주끈 덕택에 머지않아 때가 오면 서로 만나고 사랑하게 되며, 그 마음이 어떻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네. 그런데 둘 사이에 만일 다른 남자나 여자가 끼어들면 노끈이 얽혀 드디어는 누군가 한사람은 죽고 만다네. 나는 그런 것을 여러 번 보았지. 나를 따라 오시게.”

노인은 자루를 들고 일어섰다. 시장에서 노인은 어느 노점은 가리켰다. 거기엔 머리가 흐트러진 초라한 노파가 야채를 팔고 있었는데 가슴에는 한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바로 저 여자 아일세.”

노인이 노파의 가슴에 안겨 있는 여자 아이를 가리켰다.

“어르신, 지금 저를 놀리는 겁니까?”

위고가 화를 냈다.

“그렇지 않네. 저 아이는 행운의 별 아래서 태어났어. 그래서 저 아이는 자네와 부부가 되어 행복하게 될 것이며, 후에는 아들 덕에 높은 지위의 부인이 될 걸세.”

위고는 말라빠진 초라한 계집아이를 보고 몹시 낙망했다. 그래서 뭔가 노인에게 질문하려는 순간 노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저작권자 © 남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