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월하노인(하)

그는 축 쳐진 어께를 하고 여관에 돌아왔다. 그래도 학문을 한 사람인데 비록 양가집 규수는 얻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중류 가정의 아리따운 처녀 정도는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저렇게 추하고 더러운 아이를 그것도 오래오래 기다려 결혼하다니 생각할수록 위고로서는 납득하기가 힘들었다. 그는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위고는 하인을 데리고 시장에 나갔다. 그는 무서운 음모를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 아이를 죽이려고 한 것이다.

“저 아이를 죽이면 내가 충분히 사례하겠네.”

위고는 하인에게 여자 아이를 가리켰다. 잠시 후 시장의 한 구석에서는 칼부림이 일어났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시장의 웅성거림을 가르고 자지러지게 들렸다. 하인이 여자 아이를 죽이려고 노파에게 달려들자 노파는 여자 아이를 잽싸게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칼이 여자 아이의 이마 위를 스치기만 하였다. 노파가 사람 살리라고 소리치자 하인은 도망쳤다.

“어찌 됐어?”

“실패했습니다. 칼로 찌르려는데 그만 노파가 아이를 끌어안는 바람에 칼이 스쳤습니다. 아마 미간에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위고는 곧 그 도시를 떠났다. 그리고 3년 후 명문인 담(曇)씨 집안의 딸과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아가씨는 학문도 하고 미모를 갖춘 여자였다. 그런데 결혼준비가 착착 진행되던 어느 날 그는 무서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 여자가 돌연 자살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2년 후 그는 스물여덟이 되었다. 어느 날, 위고가 향촌에 머무르고 있을 때 그곳 지주의 딸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들은 결혼을 약속하기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지주의 딸이 중풍에 걸리고 말았다. 그녀의 병은 나을 줄을 몰랐다.

일 년이 지나자 머리가 빠지고 눈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담씨 녀는 혼인을 단념하고 위고가 빨리 다른 여자와 혼인하길 간청하였다. 그리고 수년이 지났다. 드디어 그는 훌륭한 상대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미인이고 젊었을 뿐만 아니라 굉장한 독서가로 미술이나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실로 그녀에게 비길 만한 여성은 흔치 않았고 그래서 두 사람은 이내 약혼을 하였다. 그런데 그녀는 결혼식 삼일 전에 길을 가다가 돌에 부딪혀 넘어졌고 그로 인해 그만 죽어 버리고 말았다. 운명의 신의 장난일까. 위고는 운명론자가 되고 말았다. 그는 향주의 관청에 취직한 후로는 결혼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는 오직 직무에만 충실하여 그곳에서 가장 높은 관리가 자기의 조카사위로 삼고자 하였다. 위고는 심한 고민에 빠졌다. 위에게는 몹시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사양해도 관리가 꼭 혼인해 달라고 간청하므로 할 수 없이 승낙은 했으나 왠지 불안한 마음은 어떨 수가 없었다. 다행히 결혼식 날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혼식 날, 그는 처음으로 신부를 만났다. 신부는 젊었고 마음씨도 착해 보였다. 위고는 혼인식을 올리고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아내는 언제나 오른쪽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그는 그 모양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하게 여기고 있었다. 몇 달이 지나도록 그 머리 모양은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는 위고 아내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째서 머리 모양을 한 번도 바꾸지 않고 한쪽으로만 머리를 내려뜨리고 있지?”

그러자 아내는 부끄러운 듯 머리를 쓸어 올렸다.

“보이세요?”

하는 것이었다. 거기엔 웬 상처 자욱이 깊이 나 있었다.

“…….”

“제가 세 살 때 입은 상처에요. 제 아버지가 관청에서 돌아가시고 또 어머니와 오빠도 돌아가셨죠. 그 후 저는 유모의 손에 맡겨졌어요. 저희는 관청이 있던 송성의 남문 가까이에 있는 외딴 집에서 살았었죠. 유모는 야채를 길러 시장에 가져다 팔았어요. 어느 날,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도둑놈이 저를 죽이려 했대요. 영문은 몰랐죠. 우리는 원한을 살 만한 일은 한 적이 없거든요. 이것이 그때 입은 상처에요.”

위고는 아내의 말을 듣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니, 그럼 그 노인의 말이 사실이란 말인가?’

위고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아내에게 무릎을 꿇었다.

“용서하구려. 실은 내가 그 도둑이었소. 모든 게 숙명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오. 나를 용서하구려.”

“아니에요. 그것이 저의 운명이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위고는 아내에게 14년 전의 사건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었다. 그래서 둘은 하늘이 정해준 짝 임을 알고 더욱 깊이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도령님, 정말로 감동적인 이야기에요. 그런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을 보면 분명 인연이란 게 있는 것인가 봐요? 제가 도령님과 보이지 않는 명주실로 연결되어 있는 게 분명해요.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소녀의 꿈속에 도령님이 나타나셨겠어요?”

박달의 옛날이야기를 들은 금봉은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금봉이,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이 저 달로 화하여 하늘 높이 떠 있는 저 달님, 아니 월하노인이 맺어준 게 틀림없을게요. 내가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때부터 나는 그대가 세사에서 하나 밖에 없는 나의 배필이라는 것을 직감하였소. 그러니 이제부터는 나를 믿어주기 바라오.”

박달의 이야기에 금봉은 자신과 박달도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확신을 갖게 되었다. 어느 정도 열기가 식었을 즈음 물레방앗간은 다시 구름이 일고 천둥이치기 시작하면서 소나기가 내렸다. 끈끈한 열정과 정염의 불꽃이 방앗간을 태우고 있었다. 두 사람이 물레방앗간을 빠져 나올 때 반달은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고, 산에서 내려 온 안개가 마을을 뒤덮어 마치 산수화를 보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집으로 향했다. 간간히 동네 개들이 짖는 소리가 들렸다. 잠자리에 누운 두 사람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아. 어찌한다? 내가 괜히 금봉이와 인연을 맺었나? 내가 떠나가고 나면 금봉이 견디기 힘들 텐데. 괜히 정을 맺어 번뇌를 키우는 거 아닌가? 만약, 만약 내가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금봉이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 될 테고, 자칫 병이 날지도 모를 텐데.’

박달은 뒤척거리다 잠이 오지 않자 책을 폈다.

 

子曰(자왈) 黙而識之(묵이지지) 學而不厭(학이불염) 誨人不倦(회인불권)

何有於我哉(하유어아재)

공자가라사대, 묵묵히 깨달으며 배움에 있어 싫어하지 않고, 남을 가르침에

게을리 하지 아니하니, 그 밖에 또 무엇이 나에게 있으리오.

박달의 글 읽는 소리가 금봉의 부모와 방금 박달과 물레방앗간에서 사랑을 나누고 들어와 잠자리에 누운 금봉의 귀에도 들렸다. 그 글 읽는 소리에 금봉의 가족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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