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천생연분

‘저 사람이 우리 금봉이와 짝을 이룬다면 얼마나 좋을꼬. 내 눈에는 금봉이와 천생 연분처럼 보이는데…….’

금봉의 아버지 최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궐련을 피우면서 혼자 속으로 말하였다. 박달의 글 읽는 소리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산촌에 여간해서는 글 읽는 소리를 듣기 어려웠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지만 최대호는 기분이 좋았다. 대개가 논과 밭을 경작하여 살아가는 전형적인 산촌 마을인지라 마을에 서당이 없었고 공부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새벽닭이 울고 나서야 박달은 글 읽기를 멈추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 산촌에 밤마다 글 읽는 소리는 금봉의 가족과 마을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었다. 금봉 역시 박달의 글 읽는 소리에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도령님, 일어나셨어요?”

사랑채 마루에 세숫물을 떠다 올려놓고 금봉이 박달을 깨웠다. 이미 금봉의 부모는 일찍 들로 나간 뒤였다. 새벽까지 글을 읽느라 아침 늦게까지 잠자리에 있던 박달이 방문을 열었다. 박달이 금봉이와 눈이 마주치자 씩 웃어 보였다.

“도령님, 세수하시고 아침 드셔야지요.”

“어? 벌써 이렇게 날이 밝았나?”

“해가 중천에 떴어요. 어서 일어나세요. 시장하실 텐데요?”

“내가 늦잠을 잤나보구나.”

박달은 기지개를 켜고 방에서 나왔다.

“도령님, 곧 아침상 드릴 테니 어서 세수하세요.”

“그대가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아요. 미안하구려.”

아침상을 들고 사랑채로 든 금봉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보였다. 상을 내려놓고 나가려는 금봉을 박달이 불렀다.

“잠시 앉아 봐요.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무슨 일 있어요? 말해 봐요.”

박달이 금봉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령님, 두렵사옵니다.”

“무엇이 두렵단 말이오?”

“오늘이라도 도령님께서 가신다는 말씀을 하실까봐 저는 두려워 죽겠어요. 도령님이 떠나시면 저는 누굴 의지하고 살아야 해요?"

“떠나야하겠지요.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는 몸으로 벌써 여러 날을 이곳 벌말에서 머물렀으니 나도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하네요.”

“도령님, 좀 더 머무시면 안 되시나요?”

“과거가 얼마 안 남아 내일이라도 한양으로 가야해요. 이제는 그대와 그대 아버지께서 지극 정성으로 잘 해주어 발의 상처도 다 아물었고 몸도 좋아 졌으니 떠나야하겠지요. 나도 더 머물고 싶지만 과거 볼 날이 점점 가까워 그럴 시간이 없어요.”

“도령님, 아침 드시고 저와 가실 데가 있어요.”

“나와 갈 데가?”

“네에. 어서 조반부터 드세요.”

‘갈 데가 어디인가?’

금봉이 막 방을 나가려고 하자 박달도령이 금봉낭자의 손을 잡았다.

“자, 잠깐만. 잠깐만…….”

박달이 금봉낭자를 온기가 있는 이부자리 위로 앉혔다. 비록 잠은 제대로 자지 못했지만 금봉의 두 뺨은 발가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금봉은 아침 이슬을 머금은 한 떨기 목련 같기도 했다.

“사랑하오.”

“도령님, 밥상 앞에서…….”

“상관없소. 밥상 앞이면 어떻소?”

금봉은 박달의 뜻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요구에 순순히 응해 주었다. 금방 사랑채는 열기로 휩싸였다. 간밤에 물레방앗간에서 있었던 가슴 떨림이 남아 있는지 두 사람은 금방 달아올랐다. 뜨거운 입맞춤이 길게 이어졌고 탄성이 조용히 방문 밖으로 흘러나갔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산골에 활화산처럼 불꽃이 피어올랐다.

“사랑하오.”

“도령니임-.”

아침식사를 마친 박달과 금봉은 집을 나섰다. 금봉은 마을사람을 의식해 마을 뒤편으로 난 길로 박달을 안내하였다. 곧 산길로 통하는 좁은 길이 나왔다. 산길을 조금 더 들어가니 우거진 숲이 나왔다. 참나무, 소나무,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등 푸르고 갈색 옷으로 갈아입은 나무들로 산속은 음침했다. 금봉은 박달이 평동에 처음 오던 날 밤 헤매던 이등령 방향으로 올라갔다.

“어디 가는 건지 말해주면 안 되오?”

“도령님, 맞춰보세요.”

“어딜 가는지 모르지만 기대가 되는데…….”

두 사람은 방금 나눈 사랑 때문에 그런지 더욱 정답게 보였다. 박달이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금봉의 손을 잡아 주었다.

‘참으로 예쁘고 따뜻한 손이로다. 세상에 이렇게 고운 섬섬옥수가 다 있다니?’

박달은 백설처럼 고운 금봉의 손을 잡고 신기해하였다.

“도령님,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이 산속에서 누가 본다고요?”

“혹시 알아요. 호랑이나 늑대가 보고 질투할지요?”

“어? 그럴 수도 있겠구먼.”

“저기에요. 저기 보이시죠?”

금봉이 가리킨 곳은 성황당이었다. 천년 정도 묵은 느티나무가 기골이 장대한 거한(巨漢)처럼 떡 버티고 서있고 그 옆에 성황당이 있었다. 성황당의 외양으로 보아 상당히 오래된 듯 했다. 그제야 박달은 금봉이 자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목적을 알 수 있었다.

‘서낭당이구나. 나를 위하여 서낭신에게 빌러 왔나보구나. 고마운지고.’

“도령님, 저 돌 무덤에 돌을 몇 개 올려놓으세요.”

금봉이 길 옆에 있는 돌 서너 개를 집어 느티나무 아래 돌무덤 위에 얹어 놓았다. 그 행동이 얼마나 정성스러운지 박달은 빙그레 웃으며 지켜보았다.

“도령님, 제가 속으로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아세요?”

“모르겠는데.”

“성황신에게 도령님 과거에 장원급제 하게 해달라고 빌었어요.”

“어서, 도령님도 돌을 올려놓고 빌어 보세요.”

박달도 금봉이 집어준 돌을 정성스레 돌무덤 위에 올려놓고 두 손을 모으고 속으로 빌었다.

‘성황신님, 장원급제를 하여 금의환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금봉이를 굽어 살펴주소서. 이렇게 빌고 비나이다.’

박달이 두 손을 싹싹 비비며 느티나무를 향해 고개를 반쯤 숙이고 또 숙였다. 박달이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릴 때마다 금봉이도 합장한 채 손을 비비며 박달의 과거급제를 속으로 빌고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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