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천지신명께 장원급제를 빌다.

“고, 고마워요. 금봉 낭자. 내, 이 은혜는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박달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마음속으로 흐느끼는 금봉을 위무해 주고 싶었으나 어른들이 있어 차마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박도령, 급제하시고 고향 가시는 길에 이 마을 지나가야하니 시간이 허락된다면 우리 집에 한번 들려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겠습니다.”

술잔을 비우며 최대호가 섭섭한 심정을 토했다.

“어르신, 당연히 들려서 그간의 고마움에 보답을 드려야지요.”

“도령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리고 내 딸, 아, 아니오.”

술이 어량해진 최대호가 딸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하려다 그만 두었다. 곁에 있던 금봉의 어머니의 눈이 빛났다. 두 남자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밤늦게 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저녁상을 물리자 박달은 사랑채로 들어 금봉에게 내일 아침 떠나기 전에 전해 줄 편지를 썼다.

보세요.

전생에 나와 그대는 인연이 있었나 봅니다. 생면부지의 나를 이렇듯 따뜻하게 대해준 그대와 그대의 부모의 은혜는 내 죽을 때 까지 잊지 못할 것 같소. 그대와 나눈 사랑은 절대 불장난이 아니오. 내 누누이 말했듯 과거에 합격하면 제일 먼저 그대에게 달려와 기쁨을 함께 할 것이오. 내가 떠나더라도 절대로 슬퍼하거나 마음 상하지 않도록 각별히 몸조심하오.

이별은 곧 있을 만남을 위한 준비를 하는 일이라고 생각 하면 되오. 과거에 합격하고 늦어도 삼 개월 안으로 다시 그대를 찾아 올 것이니 절대로 낙심하거나 마음을 조급하게 하면 안 되오. 나도 그대가 많이 보고 싶을 것 같소.

- 박달 -

박달은 편지를 곱게 접에 머리맡에 두고 잠을 청하였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보름달 같은 금봉의 얼굴, 도톰한 입술, 금방이라도 빠져들 것 같은 깊은 산속 옹달샘 같은 눈동자……. 박달은 금봉을 불러내 한 걸음에 물레방앗간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금봉 역시 내일 날이 밝으면 떠날 박달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금봉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등령에서 가져온 밤을 쪄서 사랑채로 가져갔다.

다시 자리에 누웠지만 밤이 깊어질수록 정신은 더욱 또렷해 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금봉은 장독대로 가서 정화수 한 그릇을 장독에 올려놓았다. 그믐달이 서천을 향해 조용히 흐르고 멀리서 산 짐승 우는 소리가 심란한 금봉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집 바로 뒤 동산에서 부엉이가 짝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금봉은 그만 눈물을 주르르 떨구며 흐느꼈다. 잠시 후 정신을 가다듬은 금봉은 합장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님께 비나이다. 우리 박달 도령님께서 과거에

장원급제할 수 있도록 굽어 살피소서. 우리 도령님이 과거에 꼭 합격하도록 도와주소서. 비나이다. 달님, 달님, 우리 도령님, 꼭 장원급제하도록 도와주세요. 소녀, 이렇게 빕니다. 우리 박달 도령님이 꼭 과거에 장원급제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도령님께서 과거에 합격하셔야 하옵니다. 도령님이 입신양명하시고 또한 제가 도령님과 함께 백년해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렇게 빌고 비나이다. 도와주세요.”

금봉이 달을 향해 정성을 다해 빌고 또 빌었다. 밤이슬이 뽀얗게 내려 금봉의 머리와 이마를 은빛으로 촉촉이 적셨다. 금봉은 박달이 처음 자신의 집을 찾았을 때의 모습을 떠 올렸다. 분명 꿈속에서 수도 없이 만나 사랑을 나누었던 그 헌헌장부가 틀림없었다.

지금 이순간에도 금봉은 천지신명에게 지성을 드리면서 가슴 짜릿하고 꿈결 같았던 짧은 추억을 하나하나 반추해 보았다. 평소에는 들어가 보지 않던 물레방앗간을 늦은 밤 두 번이나 들어가 생전 처음 사랑을 나누었던 그날 밤을 생각했다. 금봉은 기도를 올리면서도 그때의 그 황홀했던 느낌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있었다.

‘도령님, 저는 생면부지의 도령님을 꿈속에서 본 그 분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몸은 도령님의 여인이 되어 오로지 도령님의 장원급제

만을 위하여 몸이 부서지도록 천지신명님에게 빌고 빌겠습니다. 꼭, 꼭 장원급제 하셔야 합니다. 장원급제하셔야 제가 이 산촌을 떠나 도령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꼭 장원급제하셔요. 천지신명님, 부처님, 달님 그리고 조상님, 박달 도령님이 장원급제하여 머리에 어사화를 꽂고 이 소녀에게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이 소녀 이렇게 간절히 빌고 또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뒤꼍에서 두런거리는 소리를 듣고 선잠에서 깬 금봉의 어머니는 뒤꼍으로 나가 보려고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람소리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여 직접 나가 확인해 보기로 하였다. 혹시 도둑이나 산 짐승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덜컥 든 금봉의 어머니는 두 손에 홍두깨를 단단히 거머쥐었다. 산촌에는 거의 도둑이 들지 않기 때문에 그녀는 겁이 났다.

‘금봉 아버지를 깨울 걸 잘못했나? 무섭기는 한데 어쩌지? 이왕 마음먹었으니 나가서 살펴보자. 무슨 일 있으려고......’

금봉의 어머니는 남편이 잠에서 깰까봐 살며시 방문을 열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 마다 금방 무엇이라도 나타날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홍두깨를 쥔 두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금봉의 어머니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녀는 소리 나는 곳을 보고 그만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어둠속을 바라보았다.

‘아니, 저, 저 애가, 저 애가 생전 하지 않던 짓을......’

금봉의 어머니는 딸을 발견하고 하마터면 소리 지를 뻔 했다. 하얀 소복차림의 딸이 장독대를 바라보면서 두 손을 합장한 채 구부럭 구부럭 절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딸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딸애가 무슨 이유로 정화수를 장독대에 올려놓고 지성을 드리는 지 알고 싶었다. 딸이 눈치 채지 않도록 살며시 접근하였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님께 비나이다. 우리 박달 도령님께서 꼭 장원급제 하도록 도와주소서. 이렇게 이 소녀, 간절하게 비나이다. 천지신명님, 달님, 조상님, 우리 박달 도령님을 도와주세요. 소녀와 박달 도령님은 이제 한 마음, 한 몸이 되었습니다. 이번 과거에 장원급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내일이면 박달 도령님께서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신답니다. 달님, 도령님이 행여 낭떠러지나 계곡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도와 주시옵고, 천지신명님은 박달 도령님의 정신을 맑게 하여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할 수 있도록 힘을 주세요.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님과 달님께 이 소녀, 이렇게 간절히 빌고 또 비나이다. 이 소녀의 소원을 꼭 들어 주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금봉의 어머니는 지척간의 거리에서 딸이 비는 기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딸의 기도소리를 듣고 그녀는 가슴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했다.

‘뭐라고 우리 박달 도령님? 아니, 저 애가? 그럼, 그 사이에 박달 도령과 정분이 났더란 말이냐? 말도 안 돼. 며칠 사이에 정분이 나다니? 이건 말도 안 돼. 이건 아냐. 내가 분명 잘못 들은 걸 거야. 며칠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내가 잘못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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