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트 공 
성영희

그에게 깨끗한 옷이란 없다

한 가닥 밧줄을 뽑으며 사는 사내

거미처럼 외벽에 붙어

어느 날은 창과 벽을 묻혀오고

또 어떤 날은 흘러내리는 지붕을 묻혀 돌아온다

사다리를 오르거나 밧줄을 타거나

한결같이 허공에 뜬 얼룩진 옷

얼마나 더 흘러내려야 저 절벽 꼭대기에

깃발 하나 꽂을 수 있나

저것은 공중에 찍힌 데칼코마니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작업복이다

저렇게 화려한 옷이

일상복이 되지 못하는 것은

끊임없이 보호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리 거미가 정글을 탈출할 때

죽음에 쓸 밑줄까지 품고 나오듯

공중을 거쳐 안착한 거미들의 거푸집

하루 열두 번씩 변한다는 카멜레온도

마지막엔 제 색깔을 찾는다는데

하나의 직업과 함께 끝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가 내려온 벽면에는 푸른 싹이 자라고

너덜거리는 작업복에도

온갖 색의 싹들이 돋아나 있다

그의 거주지는 늘 허공이었다 그는 종일 허공의 벽을 타고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은 허공에서만 전시되었다  지상의 사람들은 그 허공을 정원이라 여기며 그에게 팽팽한 밧줄을 던졌다.

그의 정원은 위작이거나 모작이었다 그의 부리가 닿을 때마다 꽃들은 있는 힘을 다해 붉어졌다 정원은 완전한 봄이 되었다 지상의 사람들이 완성된 정원을 보고 박수를 쳤다 '

허공에 태어난 정원은 잎이 지지 않고 꽃이 시들지 않는 지루한 기쁨으로 가득 찼다 무거운 날개를 열고 그가 잠시 지상으로 내려왔다.// 손순미시의 [페인트 공]/이다.

이 시를 읽다가 위 시가 떠올라서 다시 찾아 읽는다. 두 시 모두 건물외벽을 칠하는 페인트 공을 거미 혹은 화가로 형상화하였다. 페인트가 묻은 것을‘거미의 보호색을 띤다.’라고 한 것과‘벽면에는 푸른 싹이 자란다.’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손순미의 시에서는‘지루한 기쁨’이라는 구절이 재미가 있었다. 식물이 아닌 그림에서 오는 화려하지만 실체가 없는 그림이라는 사실을 공유하고 있다. 시도 세상사처럼 진(眞)이라는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개념은 언제나 타당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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