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이별의 정한(情恨)

딸의 비손하는 소리를 엿듣던 금봉 어머니는 충격을 받았다. 다리에 힘이 빠지고 맥이 빠져 곧 그 자리에 쓰러질 것 같은 것을 억지로 버티고 섰다. 침착하고 얌전한 줄 알았던 딸이 며칠 사이에 근본을 알 수 없는 과객과 정분이 났다는 것을 금봉 어머니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아냐, 내가 뭘 잘못 들었을 거야.’

금봉 어머니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딸이 지극한 정성으로 천지신명께 비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박달 도령님께서 장원급제하도록 도우소서. 이렇게 빌고 비나이다. 이 소녀의 청을 들어주소서. 박달 도령님이 무사히 한양에 도착해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박씨 가문에 부귀영화를 주시옵고, 이 소녀도 박달 도령님과 함께할 수 있도록 천지신명님이시여, 도와주소서. 이렇게 간절히 비옵나이다.”

‘아아, 큰일이로다. 내가 한눈을 판 사이에 저 애가 도령과 눈이 맞았더란 말인가?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금봉 어머니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방으로 돌아와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내일 아침 박달이 떠나고 나면 마음이 여린 딸은 앞으로 어떻게 지낼지 걱정이 앞섰다. 달이 서산에 기울자 밤이슬을 뽀얗게 맞은 금봉은 그제야 잠자리에 들었다.

‘금봉 아버지에게 알려야 하나 아니면 나 혼자 가슴에 묻어두어야 하나. 아니야. 그러다가 나중에 무슨 탈이라도 나는 날에는 나 혼자 감당하기 힘들 수도 있어. 저 애가 저리 간절하게 천지신명과 달님에게 지성을 드리는 것으로 보아 도령과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해.’

금봉 어머니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신경이 예민한 최대호는 아내가 잠자다 말고 나갔다 들어와 뒤척이는 것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잠을 자지 못하는 거요? 무슨 일 있는 게요?”

남편의 말에 금봉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금봉 아버지, 큰일 났구려.”

금봉 어머니는 남편에게 방금 본 일에 대하여 말하였다. 궐련을 길게 빨아 한 모금 깊게 마시고 연기를 내뱉은 금봉 아버지는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덤덤한 표정이었다.

“당신은 내 말 듣고 걱정도 안 되우? 내 말 듣고 있어요?”

“남녀가 유별하다고는 하나 뜻이 통하면 둘이 하나가 되고 뜻이 통하다가도 이변이 생기면 하나가 둘이 되는 것이 인간사 아니겠소. 너무 걱정하지 말구려. 내가 보기에는 금봉이가 도령을 좋아하는 눈치지만 무슨 일이야 있었겠소. 단지 산골 소녀가 잠시 마음이 어지러워할 뿐, 너무 걱정할 일은 아닐 거요.”

최대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였다.

“참으로 당신은 대범하구려. 만약 혼기가 꽉 찬 딸년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어쩌려고 그러우? 남녀가 유별한데 며칠씩 집안에 함께 있도록 하였으니 무슨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났을 것 같아요.”

“아니, 사달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여?”

“당신 정말로 몰라서 그러우? 금봉이가 우리 내외가 없는 사이에 도령과 정분이라도 나누었다면 어쩌게요?”

최대호는 총각 때 이웃 동네에 얼굴이 반반하다고 소문난 지금의 아내를 유혹하기 위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구애 작전을 펼친 끝에 여러 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장가를 들 수 있었다. 최대호는 아내의 푸념을 들으면서 옛일을 생각하였다.

‘정분? 그렇다면 금봉이와 도령이 낮에 우리가 없는 사이에 그런 일을 벌였단 말인가?’

“별걱정도 많네그려. 사리 분별할 줄 아는 다 큰 아이들이 뭘 어찌했겠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눈이나 붙이구려. 밤도 꽤 깊은 것 같은데…….”

“당신은 잠이 오우? 내 짐작에는 금봉이와 도령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해요. 저 애가 늦은 밤에 천지신명에게 치성(致誠)드리는 것을 여태껏 보지 못했는데, 잠도 잊은 채 치성을 드리는 것을 보면 분명해요.”

“뭐가 분명하다고 하는 거요? 쓸데없는 생각 말고 잠이나 자요.”

최대호는 아내의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딸의 성격이 여리고 착해 세상 경험이 많고 생김새가 그럴듯한 사내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딸의 마음을 훔치고도 남을 것 같았다.

‘가만히 있어 보자. 만약에, 만약에 도령이 금봉이를 건드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다면, 일어난다면 어찌 되나? 그렇지 도령이 과거에 떡하니 붙어서 우리 금봉이를 배필로 맞아들이면 그보다 멋진 광영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러나 만약에 도령이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그때는 또 어찌 되누? 혹시 딸애 뱃속에 도령의 씨앗이라도 자라고 있는 건 아닌지? 만약 그리되었다면 이거 큰일인데.’

최대호는 궐련을 다시 한 대 말더니 불을 붙였다.

‘박달과 금봉이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면 박도령이 꼭 과거에 합격해야 하는데. 그래야 우리 딸의 장래도 보장될 테고, 나는 이 고을에서 행세 한번 그럴듯하게 해볼 수 있을 테고. 그런데, 과거에 낙방하면 참으로 난감한데……. 이것 참, 기뻐해야 하나 아니면 슬퍼해야 하나, 좀처럼 분간이 안 가네.’

평생 땅을 벗 삼아 살아온 최대호는 산촌에서는 보기 드물게 고운 딸을 내세워 그럴듯한 사윗감을 얻고 싶어 했다. 그러한 그의 염원이 늦은 밤 자신의 집을 찾아오는 과객에게 선뜻 밥과 잠자리를 제공으로 이어졌다. 과객 중에 괜찮은 사내가 있으면 딸과 인연이 되기를 은근히 기대해 왔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때마침 자신의 집에 묵게 된 박달이 최대호의 마음에 딱 들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박달은 자고 나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야 할 몸이고, 박달과 분명 연분이 난 딸은 기약도 없이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된 것에 최대호는 가슴이 답답하면서 무거웠다. 부부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새벽 첫닭이 울자 동네 닭이란 닭은 모두 홰를 쳐대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최대호는 박달이 유난히 도토리묵을 즐겨 먹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마침 도토리를 따다가 말려서 가루로 만들어 놓은 것이 얼마든지 있어서 박달이 한양으로 떠나면 묵을 쑤어서 줄 참이었다. 최대호는 아내의 허리를 잡고 흔들었다.

“여보, 도령이 아침 일찍 떠나야 하니 조반을 빨리 차려 줍시다. 그리고 도령이 묵을 좋아하니 묵 좀 쑤구려. 도령이 밥 먹을 때 보니 도토리묵을 아주 좋아하는 것 같던데…….”

“알았어요.”

“어서 일어나구려. 박도령이 떠나는 날 아침이니 따뜻한 조반을 먹여 보냅시다. 어서 일어나요.”

남편의 성화에 잠자리에서 일어난 금봉 어머니는 조밥은 지으면서 도토리 가루를 가마솥에 넣고 고았다. 최대호는 박달에게 줄 미투리를 서너 켤레를 만들어 놓았다. 박달의 다 해진 미투리를 보고 준비해 두었다. 한양까지 가려면 적어도 미투리 서너 켤레는 족히 필요할 것 같았다. 부엌에서 덜거덕거리는 소리에 금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벽까지 장독대에서 박달의 장원급제를 비는 지성을 드린 탓에 아직 잠이 눈꺼풀에 잔뜩 묻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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